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안전한 울타리를 가짐과 동시에 불편한 일이기도 하다. 교회 안에는 혼자 할 수 없는 일이 산재되어 있다. 또한 일을 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만족’을 끌어낼 마무리를 하기 어렵다. 교회의 건물과 각종 일들이 공동의 소유이며 공동의 책임으로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공동 생활은 사도행전을 따르며 아주 성경적이다. 더구나 그 안에 봉사와 일상들은 단순히 ‘일’로만 접근하기에는 큰 의미를 담고 있다. 이에 각각의 봉사 영성을 하나 하나 생각해보고 우리들의 존재를 생각해보기로 한다.
일상영성
꽃 봉헌 영성
이 에스더 사제
바야흐로 꽃이 만발하는 계절이다. 몇 년 전부터 성공회원주교회는 일반적인 꽃꽂이대신 자연 그대로 상태의 꽃이 제대를 장식하고 있다. 녹색교회답게 꽃꽂이용 스폰지가 생략되고 자연 상태에서 그 모습 그대로 제대에 올려진다. 화분도 종종 올라오는 데 지난 해 올라온 것을 잘 가꾸어 올해 다시 꽃이 피면 교회로 가지고 온다. 참 정성스러운 손길이고 놀랍다. 매 주일 꽃은 그 주일에 기도와 같다. 지난 해 상사화가 올라온 그 주일 감격을 잊지 못한다. 꽃과 잎이 다른 시기에 피어 서로를 그리워한다는 상사화. 그리움이 사무쳐 한 주간을 고요함으로 이끌었다.
과연 꽃 봉헌은 영성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 먼저 꽃에 대한 설명을 드릴 필요가 있다. 꽃은 만물의 절정을 상징한다. 때가 되면 그 자태를 드러내며 봉우리로 시작해 만개할 때까지 눈길을 끄는 꽃. 꽃은 자기 얼굴을 드러낼 때 그 식물은 절정의 시기를 맞이한다. 이를 두고 성령의 현현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꽃처럼 인간도 성령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면 자기 자리를 잘 찾고 빛을 발한다. 그 자리를 잘 찾는 일은 성령의 축복으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성령의 모습은 각각의 꽃만큼 다양하다. 각각의 꽃들은 모양도 색도 다르게 생겼다. 그러니 성령은 한 하느님으로부터 온 하나이되 그 드러냄은 다 다른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다름을 받아드릴 수 있게 되는 일이다. 사도행전에 나온 오순절처럼 그들은 성령의 불길로 서로 다른 말을 하지만 서로는 자기의 말로 알아듣게 된 것이다.(사2:1-8)
이 일은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 마지막 날의 약속이기도 하다. ‘그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14:20)라는 것이 이루어진 순간, 만물은 자기 색을 한껏 가진다. 서로가 다른 모습이지만 그 분 안에 한 진리가 있다. 다른 모습이되 그 본래의 창조의 목적과 기쁨을 같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꽃 봉헌자들은 꽃의 모양과 색을 보고 ‘어울림’을 고려한다. 특별히 전례력을 따르는 교회의 경우는 그 어울림에 주제도 고려하게 된다. 자연의 색은 그 색이 화려해도 서로 잘 어울린다. 그리고 아주 촌스러울 것 같지만 제법 근사한 모양을 내는 경우가 많다. 꽃은 절기에 맞게 핀다. 그리스도교의 절기는 계절과 오묘하게 일치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꽃들을 배치하는 과정에 대해 본격적으로 설명해보자. 꽃꽂이 봉사자들은 다양한 꽃들을 어울리게 배치하는 과정은 창조주의 입장에 서는 일이다. 제자리를 찾아주며 그 모양이나 그 색의 어울림들이 창세기 처음에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1:10하)의 마음이 들어오는 지 살펴보는 일이다. 창조주가 우리를 보시기에 어떤지 생각해보는 일이다.
종종 봉사자들이 ‘이번 아이들은 싱싱해요’ ‘지난번 아이들은 색이 잘 어울렸어요’라며 재료들을 설명하는 것을 들어본다. 그것은 꽃을 배치하며 준비하는 과정이 창조의 세계의 영역임을 무의식중에 인식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손으로 창조한다. ‘그들은 내 백성이라고 불리는 것들, 나의 영광을 빛내려고 창조한 내 백성, 내 손으로 빚어 만든 나의 백성’(이 43:7)의 구절은 꽃봉헌자의 손에 대한 묵상으로 좋은 소재이다.
마지막으로 꽃 봉헌을 볼 때의 자세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꽃 봉헌물은 하나의 작은 세상이다. 그 안에는 주인공도 있고 배경도 있다. 사실 모두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봉헌물은 그리 썩 잘 어울리지 못한다. 제자리가 있으며 각각의 배치는 자리 찾는 일이 전부이다. 그 작은 세상은 내 마음이며 내 마음의 빛과 어둠이 다 담겨져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은 나를 내 안에도 밖에도 서게 한다. 내 안의 만물들이 나에게 하나씩 말을 거는 일이다.
그래서 꽃 봉헌은 기도와 같다. 기도는 그런 것이다. 자기 자리를 잘 찾게 하는 일이다. 자기의 잘못을 남 탓으로 시간을 보낸다면 성찰의 방향을 옮겨야 한다. 주신 능력이 부족하다고 한탄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옮기며 정확하게 자리를 잡아 주면 된다. 꽃만 둘 때보다 넓은 초록잎이나 나뭇가지를 꼽으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그러니 그 꽃들을 보면서 내 마음이 설레기도 하고 시선을 제대에 고정하게 된다. 그렇게 된 꽃꽂이를 제대를 중심으로 배치한다. 그것은 제대에 마음을 정하는 일이다. 그리스도 한분에게 내 마음을 온전히 향하며 성령의 현현으로 각각의 색을 뽐내는 꽃들에게 자리 배치를 해 시선을 끄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분에게 시선이 옮겨지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