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집 영성 1) 나
기획의도 : 나눔의집 영성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성공회원주교회는 6월 나눔의집을 위해 기도합니다. 나눔의집 활동은 교회를 건강하게 하며 또한 교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나눔의집 역사를 서술하거나 사업 내용을 담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몇 년간의 현장 경험과 활동가들과 함께 기도를 바탕으로 적고자 합니다. 시리즈가 끝날 때 즈음 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나눔의집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나눔의집영성 시리즈 1) 나 2) 너 3) 우리 4) 함께 걸어가기
나눔의집은 ‘나’로부터 시작합니다. ‘나’에서 시작하면 많은 문제들이 명쾌합니다. ‘나’는 세상을 읽는 도구며 잣대입니다. 모든 것은 내 안에서 일어납니다. 생노병사의 삶 속에 희노애락은 결국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 중에 ‘나’는 그 중심에 서 있습니다. ‘나’ 중에 진짜는 ‘연약한 나’입니다. 연약한 나는 나 전체를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나를 돌보는 일이 나를 구원하며 그런 나가 모이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가진 존엄함은 고유합니다. 세계인권선언 맨 처음은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고 시작합니다. 성경에 제일 처음 적힌 첫문장도 같은 뜻입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1:1)’ 각 개인은 모두 동일하게 그의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선교는 이와 맞닿아 있습니다.
각 개인의 하늘과 땅은 모두 동등하게 소중합니다. 돈으로도 물질로 그 가치를 책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눔의집 이웃들은 개발의 속도에 넘어져있습니다. 개인의 하늘과 땅을 존중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이웃이라 부르는 이들은 ‘경쟁’에 뒤쳐지거나 그 가족들입니다. 그들은 각각의 ‘나’이지만 늘 집중 받지 못했습니다.
나는 하느님이 창조한 몸입니다. 모두는 하느님의 영광을 빛내려고 창조했습니다. 그들은 누구나 하느님 나라를 완성합니다. 하지만 나는 때로는 아프기도 하고 운이 없기도 합니다.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기회를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도저히 혼자 힘으로 극복 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누구나 그럴 수 있습니다.하루는 낮과 밤이 있기 때문에 누구나 밤을 지나게 됩니다. 밤을 맞이해 원하지 않는 순간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런 내가 있는 변두리에 나눔의집이 머뭅니다. 그 변두리는 창조의 현장이고 획일적이지 않기 때문에 창조의 영역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진화는 돌연변이에서 시작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눔의집은 변방의 터의 삶에서 퍼져나는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그들 모두는 각각의 ‘이름’을 가졌습니다. 찾아오지 않는 이들에게 이웃이 되기 위해 나눔의집은 그들에게 가장 먼저 이름을 물어봅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사업을 시작하며 그 이름을 물어보면 이제 그 사람은 ‘이름’을 가진 내 이웃이 됩니다.
나는 그의 ‘이름’을 알며 그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은 내 이름이 빛나는 순간이 됩니다.그 이름을 통해 나는 그 사람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이름은 상을 탈 때도 불리지 않았고 칭찬을 들을 때도 불리지 않았지만 지금 내 이름이 중요합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개별성을 담고 있습니다.
그 지역에 사는 아무개라 부르면 그 개별성이 무시됩니다. 이름을 물어보고 사연을 물어보면 이웃으로 기억됩니다. 사연을 귀 기울여 듣다보면 ‘사람이 여기 있다’고 압니다. 나눔의집은 그리하여 사는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머무는 장소에 집중합니다. 나눔의집이 재개발지역이나 달동네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활동가들은 그저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나눔의집에 삽니다.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거기 삽니다. 그 사람은 거리에 삽니다. 임대아파트에 삽니다. 쪽방에 삽니다. 좁은 골목에 삽니다. 그리고 인적 드문 그 곳에 삽니다. 거기서 사연을 가지고 삽니다. 이제 나도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나’를 비로소 만납니다.
나눔의집 활동가로 일하다보면 유달리 고통에 공감할 특별한 한 명의 이웃을 만나게 됩니다. ‘나에게 아픈 이’입니다. 그 ‘이름’(개별성)에 꽂힙니다. 그것은 활동가들마다 다 다릅니다. 여기에는 통증을 느끼는‘나’가 있습니다. 종종 우리들은 많은 사업들 중에 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며 나를 만납니다. 그 사람이 아이이면 내 어린 시절을 찾습니다. 그 사람이 남자 어른이면 아버지를 만납니다. 눈물 짓는 한부모 엄마에게서 내 엄마를 만납니다. 독거 어르신 삶 속에서 나의 외로움을 만납니다.
더 이상 그들의 통증이 그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그들을 돌보는 일이 나를 돌보는 일이 됩니다. 돌보며 털어놓는 ‘아픔’은 아주 중요합니다. 딱 그 지점에서 치유는 일어납니다. 아픔을 치료하는 과정을 나눔의집이 함께 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나를 잊어버리고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려운 이유, 내가 아픈 이유를 비로소 말하게 되고 듣게 됩니다. 이유를 아니 답은 아주 쉽게 찾게 됩니다.
살아온 날들이 나에게서 멀어진 과정이었지만 이제는 나를 만나는 여정만 남아있습니다. 밤을 뚫고 한 낮을 맞이합니다. 나의 아픔과 어려움을 명확하게 보니 ‘나는’ 이제 두렵지 않고 세상에 지치지 않습니다.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어둠이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롬1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