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나’는 ‘너’를 통해 완성해갑니다. 아기였을 때 그 대상은 엄마입니다. 엄마와 분리가 되지 않은 아기는 엄마의 웃음, 목소리, 냄새 등으로 자기를 형성해갑니다. 나를 대하는 상대에 따라 내 어떤 것이 달라지는 것은 관계중심적인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러합니다. 절정에 이르는 시기는 청소년 시기인듯합니다. 친구 문제로 몸살을 앓습니다. 나의 세계를 완성해 어른으로 가는 여정 중에 발생하는 당연한 일입니다. 건강한 ‘너’를 많이 만날수록 ‘나’는 건강해집니다.
세계의 수많은 종교가 ‘이타성’을 닮고 있습니다. 예수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마22:39)를 둘째 가는 계명으로 꼽았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길은 오롯이 나로 사는 삶에서 벗어나 돌아보고 함께 살기를 훈련하는 과정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서있는 곳을 바꾸어보기는 나의 분노를 식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많은 심리 프로그램들이 이 역지사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나눔의집은 너를 바라보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원주나눔의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해 농사 프로그램 이름은 ‘너를 닮은 감자’였습니다. 수확이 좋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감자를 심고 돌보고 수확하면서 ‘너’를 돌보는 일을 해본 것입니다. 뜨거운 뙤약볕 밑에서 때때 청소년들은 흙 속에 씨 감자를 심고 물을 주고 주변 풀을 뽑아주고 캐내기를 했습니다. ‘너’가 잘 자라도록 돕는 일을 했습니다. 대부분의 일생을 나 한 몸 잘 살기에 몸 바치는 자본주의를 살고 있는데 나눔의집은 아이들이 ‘너’를 돌보는 일을 배웁니다.
이뿐 아닙니다. 나눔의집은 너를 돌보는 일을 통해 한층 성숙한 자아는 형성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프로그램 곳곳에 ‘너’를 배려하는 방식을 담고 있습니다. 서로에게 폭력을 쓰지 않고 대화하는 법을 배웁니다.이용시설과 프로그램 안에서의 규칙은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가를 담고 있습니다. 내용적으로는 너를 해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너를 도우며 나도 성장하는 ‘또래 멘토’ 프로그램을 통해 청소년활동가들을 키웁니다.
선생님을 배우지만 또래 간 ‘역동성’을 고려한 다양한 동아리 활동을 통해 청소년을 성장시키고자 합니다. ‘너를 통해 배우는 나’는 아주 큰 효과를 가져옵니다. 문화도 놀이도 공부도 ‘너’라는 길에서 시작합니다.
나눔의집의 푸드뱅크 사업에서도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 문을 연 ‘정동국밥’은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일 국밥의 정신입니다. 전면에 화두로 삼는 것이 다릅니다. ‘배고픈 이들의 밥 한그릇’을 염두에 둡니다. 배고플 때 초코파이나 요구르트를 먹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은 밥을 먹고 싶습니다. 그래서 서울 한 중간에서 국밥을 비교적 싸게 먹으며 다른 이의 밥 한그릇을 도울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원주나눔의집의 목요 반찬통에도 그 정신은 담겨있습니다. 맛있는 반찬이 정갈하게 전달되기를 원해서 수거해서 세척하고 소독하는 과정이 있지만 스테인레스 반찬통을 씁니다.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더 기쁘게 해주고 싶은 수고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한 끼의 밥을 먹으면서 그들은 단순히 몸만 돌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먹을거리’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너를 살핍니다. 나의 평화가 너의 평화와 맞닿아 있음을 알고 이타적인 삶으로 들어가 사는 삶을 지향합니다.
세상이 나로만 이루어지지 않음을 깨닫기 때문에 너는 중요한 잣대가 됩니다. 그래서 나눔의집 활동의 기준은 다른 이의 기준점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넘어진 이들의 삶을 회복시키는 데 기준을 세상의 잣대에 둡니다. 초연하거나 체제 타도적인 접근방식보다는 제도권으로의 삶을 뜻하기도 합니다. 물론 억울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세상을 바꾸는 함성도 끝임없이 주제로 다룹니다. 그것은 안과 밖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모두가 산 위에 삶만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듯, 누구나 광장에서만 살아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너’로 담는 문장을 말합니다. 읽으며 성경 속에 ‘너’가 ‘나’가 됩니다.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너를 나눔의집은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들을 ‘이웃’이라고 부릅니다. 그들과 나의 경계를 구분 짓지 않고 네 이웃을 돌보는 일을 내 몸을 돌보듯이 합니다. 그런 속에서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믿습니다. 우리들의 활동 근거는 그리하여 너입니다. 너를 돌보는 일이 나를 돌보는 일이며 또한 진리를 위해 길을 걷는 이들의 걸음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