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그리스도교 안, 여성리더십 탐방기 1)
산토 세칠리아 교회
(The Basilica of Santa Cecilia in Rome)
로마에 다녀온 지 벌써 3개월이 지났다. 로마에서 가장 인상적였던 것은 도시 전체가 한 권의 역사책이라는 점이었다. 곳곳은 헬레니즘 문화와 기독교 문화의 변화의 융합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숙소는 로마 시내 중앙 판테온 신전 옆 피정숙소(Domus Internationalis Paulus VI)를 선택했는데 신기하게도 어느 곳을 가든 길 끝에서 만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많은 전쟁 끝에 유물들이 로마에 도착할 수 있기 좋게 도시 설계가 되어 골로세움 옆에 로마나 광장(Poro Romema)을 향하고 있었다.
로마 시내에만 수백개의 교회가 있지만 내가 참석한 ‘성공회여성리더십과정’은 5일동안 압축적으로 여성 리더십이 숨겨져 있는 교회 현장을 투어하고 자신의 현장에서의 미션과 비전을 신뢰서클을 통해서 찾아보는 과정이었다. 만만치 않은 일정이었다. 우선 토론이 가능한 영어실력을 갖추어야 했고 주로 걸어서 5일간 투어할 준비를 마치고 참석해야 했다. 여성신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했고 관심도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나의 경우 관심도와 그간의 신뢰서클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이에 몇 회기에 걸쳐 방문한 몇 교회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교회의 소개는 전문 가이드가 아닌 관계로 허술하기 짝이 없겠지만 로마에서 초기 기독교 역사부터 여성의 리더십이 어떻게 자리잡았는지 기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많은 이들이 교회 안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균형잡힌 시각으로 선교 현장을 바라보기를 원할 뿐이다.
첫 번째 찾아간 교회는 산토 세칠리아 교회이다. 바실리카는 교회를, 산토는 성인(saint)의 이탈리아어이다. 세칠리아(세실리아) 성인의 무덤이 있으며 그 신앙을 굳건히 지키던 지하교회와 수도원 등을 함께 가지고 있다. 교회 정면 사진의 왼쪽은 1060년부터 1098년에 건설된 종탑이다. 사진을 찍을 당시만 해도 의미를 깊이 새기지 못해 잘라서 촬영을 했다.
세 가지 정도의 흠뻑 빠질 수 있었는데 첫 번째는 제대의 프레스코이다. 세칠리아 무덤이기도 하다. 제대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순교한 현장, 순교자의 몸을 상징한다는 말이 이해되는 대목이다. 세칠리아는 로마귀족 가문의 딸이었는데 그리스도를 구원의 절대적 진리로 삼고 결혼을 한 후에도 남편을 설득해 함께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전도한다. 제대 위에 그림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세칠리아와 그의 남편, 그리고 그의 친구, 남편의 동생까지도 선교한 그림이 아름답게 그려졌다.
세칠리아가 후에 박해를 받다가 목욕탕에서 쪄죽는 형벌을 받았으나 죽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목을 쳐서 서서히 죽게 된다. 그 유해를 카타콤에 모셔두었는데 나중에 로마 교황이 이 카타콤을 발굴하다 세칠리아 시신을 발견해보니 전혀 썩지 않았다고 한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지하 교회 위에 이 교회를 세웠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세칠리아의 죽음은 의미 깊었으며 믿음의 길을 따르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이를 지켰으며 봉쇄수도원이 함께 있는 힘있는 교회다. 또한 이에 감명받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벽화나 조각등을 건설해서 교회를 꾸미고 있으며 교회 정경 또한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도록 꾸며져있다.
지하교회는 아주 아름다웠다. 이번 리더십에 소속된 교회 들중에 카타콤에 들어가는 경험이 있었는데 사실 로마의 모든 교회는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 가능했으며 초기에는 박해의 역사만을 간직할 뿐이었다.그들은 진실로 깨닫기 원했으며 확신했다. 그리스도가 빛이시고 구원이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