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과 자연 시리즈 4) 땅
하느님과 자연 시리즈
1) 새 2) 밤하늘 3) 꽃 4) 땅 5) 산과 강 6) 태양 7) 새싹 8) 공기
오래전 함께 계셨던 신부님이 10년 동안 머문 교회를 떠나면서 ‘흙 한 삽 떠가야지’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건축을 하셔서 교회에 더 애착이 있으셨지만 성공회 발령 상 그 마음을 깊이 들어 낼 수 없었다. 이를 들은 한 분이 교회 흙으로 화분을 만들어서 선물로 드렸다. 그 분의 새 부임지에 얼마 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화분이 성경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땅이 무엇이기에 그 일부를 담아 가져가셨을까. 한참을 내 마음속에 의문으로 남겨두었다. 아무리 큰 그릇이라도 이 세상 땅을 다 담을 수 없다. 그래서 소유가 불가능하다고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소유주가 있어 매매되고 있지만 그것을 증명해주는 문서만이 거래될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땅을 소유했다고 보고 있지만 실상은 문서를 소유한 것이다. 그 문서가 땅을 대변한다고 믿게되면서 인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었던가.
땅에 보이지 않는 선이 있다고 하지만 땅에 서 있으면 그 선은 보기 어려울 뿐이다. 그 땅은 그 소유와 상관없이 늘 변화한다. 늘 무엇가를 받아내고 늘 무엇가를 품고 있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며 ‘변화’한다. 그 변화는 땅의 꿍꿍이를 대변하기 때문에 당장은 알 수 없다. 땅은 옮길 수도 없고 없앨 수도 없다.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거기에 있을 때는 반드시 딛고 서야 하는 현실이다. 땅에 발을 디디지 않는 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은 유령이다.
몇 해 전 아버지가 위독하실 때 아버지와 장례 일을 의논했다. 그 일을 맡아야 하는 책임감에 슬픈 마음에만 사로잡힐 수는 없었다. 그런 나에게 아버지는 “아무 것도 아닌 땅에 훨훨 뿌려….” 하셨다. 아버지의 유언은 자유를 갈망하고 계셨다. “그래도 아버지 찾아가고 싶을 때 보고 싶을 때 가족들이 슬플 것 같아요.” “그럼 너희들 뜻대로 해라.” 그리고 고통에 가득 찬 아버지는 숨을 몰아쉬셨다.
아버지의 마음 속에는 돌아가고 싶은 열망을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 가신 마지막 날을 모시며 누구든 죽으면 돌아갈 곳은 ‘땅’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겨우 한 평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그 공평한 세상의 무게를 보며 죽음을 배워갔다. 죽음을 배운다는 것은 죽음을 경험하는 일이다.
성공회에서는 그런 일이 년 중 한번 있다. 사순절은 재의 축복식으로 시작된다. ‘인생아 기억하라,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재축복식 예식 중) 우리는 이마에 재를 바르는 순간, 죽음을 경험한다. 그 순간은 나의 존재가 흙이었음을 기억하는 순간이며 돌아갈 자리도 흙임을 알게 한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창 2:7) 우리의 첫 시작은 이처럼 흙에서 시작했기에 우리들은 점점 성숙해갈수록 흙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나가는 것이다. 귀농이나 귀촌이 단순한 직업의 전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생명의 자리가 결국에는 땅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죽음의 이해와도 맞닿아있다. 죽음은 결국 ‘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운동에 이어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운동을 땅에서 펼치셨다. 걸으며 길에서 펼치셨다. 길에서 사람을 고치시고 길에서 복음을 전했다. 길에서 용서하시고 길에서 자유를 선포하셨다. 계시는 동안에는 머물 곳을 정하지 않고 늘 길을 축복하시고 걸으셨다. 그의 길은 땅의 이어짐을 알리는 일이며 경계를 허무는 실천이었다.
그래서 누구나 그를 따르는 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14:6)의 그 길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 길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땅이며 그것은 우리를 살아있게 하던 그 첫 재료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땅은 언제든지 우리를 기다리며 우리에게 침묵의 진수를 알려주기 위해 ‘거기 그 자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