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과 자연 시리즈
5) 산과 강
하느님과 자연 시리즈
1) 새 2) 밤하늘 3) 꽃 4) 땅 5) 산과 강 6) 태양 7) 새싹 8) 공기
‘산과 강’이라 붙였다. 한 주제로 글을 이어오다가 ‘산과 강’이라 했다. 두 곳이 떨어져 있지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산에는 늘 물이 있다. 숲 사이를 걸으면 어렵지 않게 흐르는 옹달샘은 발견할 수 있으며 명산일수록 나무도 우거지고 우거진 나무 숲 일수록 물도 쉬이 만난다. 우리말에 ‘산천(山川)’이라는 단어는 자연스럽게 쓰인다. 그러니 내 생각처럼 조상 때부터 둘은 연결되었다고 믿었다.
단어를 이어 쓰는 데는 까닭이 있다. 산과 강은 본래가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언젠가 영화를 보았는데, 주인공이 산에 오르다 길을 잃었다. 주인공은 하룻밤을 숲속에서 지내다 ‘산에서 길을 잃을 때 물길을 찾아 내려가면 마을을 만날 수 있다’는 엄마 말을 기억하고 길을 찾게 되었다. 제목도 잘 생각나지 않는 영화지만 산 속의 물길은 마을과 이어주는 이정표처럼 기억으로 남아있다.
산은 움직이지 않으며 그 자리를 지키고 그 속에서 솟아나는 맑은 물이 세상을 돌고 돈다. 그 산은 존재로 넓은 품이 되어준다. 산 가까이 가면 사람들은 그 산을 바라보게 된다. 그 산에는 많은 것들이 깃들 수 있다. 나무도 산새도 다람쥐도 큰 짐승도 무엇도 다 깃들 수 있다. 하늘과 가까운 그 산속에 신비는 머무는 이 아니면 발견하지 못한다. 건강을 잃을 때 산을 찾아서 건강을 회복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산에는 무엇인가 다른 기운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깨닫겠다는 이들이 산기슭 곳곳에 들어가 살면서 수행을 한다. 성경 속에서도 산에 들어가 위로를 받고 하느님을 만나는 일들은 많이 찾을 수 있다. 그것은 태초부터 사람을 만드시고 그들을 쉬게 한 땅도 동산이었기 때문이다.(창 2:8) 그 뿐이겠는가. 모세는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더니(3:1) 불붙는 떨기나무에서 야훼를 만난다. 그곳은 엘리야도 진정한 쉼을 얻은 곳이기도 하다. 예수님도 그렇다. 따라오는 무리들을 피해 산으로 올라 앉으셔서 제자들에게 가르침 중에 가르침을 주셨다.(마태오 5장) 산이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산은 많은 이들에게 존재를 일깨워주는 곳이다. 그래서 산속에서는 물이 흐른다. 존재가 서 있으면 그 깨달음이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물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물은 많은 일을 한다. 생명을 살리는 일의 근간은 물에서 이루어진다.
지구의 물의 비율과 우리 몸의 물의 비율이 일치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물 아닌 것은 없다. 공기 중에도 곳곳에도 물이 있으며 물이 없는 곳에는 생명이 살 수 없다. 성경 속에서는 ‘강물처럼 오시는 야훼’(이사59:19)를 맞이하라고 한다.
강물의 신비를 지켜보라. 강물은 본래 흘러 흘러가 모양도 색도 없다. 그래서 깨달음이다. 우리가 알았다고 하는 순간, 그 앎은 이미 앎이 아니기 때문이다. 강물은 늘 새로우며 그러기에 흘러감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 첫 시작이 산이었기 때문이다. 산과 강은 아주 다르듯 하지만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이 어디인지 경계가 명확하지는 않다. 그 연결이 그만큼 자연스럽다.
산과 강이 어떻게 이어졌는지는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에덴동산의 축복을 새롭게 하는 그 자리는 요르단강가에서 이루어졌다. 물속에 담갔다 나오니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오시는 것이 보이지 않았겠는가.(마3:16) 하느님에게 받은 은총을 산에서 시작하여 강에서 완성하는 대목이다. 요르단강가를 오가며 기적을 행하시고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신 예수님의 삶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산에서 시작하여 강으로 대답하는 것은 깨달음의 과정을 말한다. 본래가 존재를 발견하고 자리를 찾아 지키면 만물을 품을 수 있게 되고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 곳에는 하느님의 품이기에 누구도 쫓겨남 없이 먹고 마실 수 있으며 자유롭다. 그 자리를 찾아 지키면 자연스럽게 깨달음은 흘러 만천하에 퍼져나간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매달린 사건의 진정성이 온 인류를 살린 것처럼. 그래서 우리는 영성의 궁극적 목적인 강물처럼 되기를 바래야 한다.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 흐르게 하여라”(아모5:24) 우리의 기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