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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에 관하여 1) 한 처음, '말씀'

작성일 : 2017-03-18       클릭 : 263     추천 : 0

작성자 원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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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에 관하여
     

 

 

 

1) 한 처음 ‘말씀’

 

 

 

    
언어에 관하여 시리즈
1) 한 처음, 말씀 2) 바벨론 사건과 성령강림주일 사건 3) 예언자들의 언어 4) 기쁨의 찬양, ‘시편’  5)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 6) 바울의 서신들 7) 요한 묵시록의 언어 8) 완전한 언어, ‘사랑’
위와 같은 순서로 언어에 관한 시리즈를 기획합니다. 이 시리즈는 성서에 근거하여 일상의 언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기획의도를 맞추고 있습니다. 때문에 언어학적인 관점이나 철학적인 접근이 이루어질 것이라 상상하지 못합니다. 다만, 성찰을 이어갈 수 있는 중요한 키워드로 ‘언어’를 삼을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사람들은 말하면서 치유된다. 내가 만난 경우는 그러했다.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자기 사연에 눈물 흘리고 자기 고통에서 가벼워진다. 이야기는 본래의 나에게 집중하게 하는 통로다. ‘Speak out’ 몇 해 전 UN CSW(유엔 여성지위위원회)를 가득 채운 주제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자신이 당한 부당함을 말하고 해방되자는 취지의 구호였다. 각각의 여성들은 자신이 마주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자유로와졌다.

CSW(여성 지위위원회)는 교회의 여성운동 진영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성경 속의 하느님을 찾아볼 대목이 많았다.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느님은 그들의 이야기, 즉, 그들의 언어와 함께 있었다. 그런 경험으로 나는 진정한 힘과 평등을 요구하고 함께 연대하기 위해서는 경청이란 자세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침묵하고 내 귀를 열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야 말로 연대의 최고의 자세라 여긴다.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고 왜곡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을까. 얼마 전 탄핵된 전직 대통령의 이야기는 같은 말인데도 해석이 불가능했다. 왜 그건 것일까. 아무리 열심히 들으려고 해도 그의 이야기 같이 보이는 대목은 없었다. 자기 이야기가 아니어서 그럴 것이다. 누군가가 적어준 이야기이거나 충분히 자기식으로 이해하지 않은 채 전달하려고 하니 그런 현상이 발생했으리라. 자기 이야기가 빠진 대부분의 결정들로 나라 전체는 고통에 빠졌다. 

 

우리는 소통을 간절히 원해 인간 세계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언어는 시대를 반영하고 사용하는 사람을 보여준다. 언어는 자신이다. 사용하는 사람을 고스란히 잘 드러내주는 도구이다. 각각의 경험을 담은 자기 말은 모국어를 바탕으로 각기 다르게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간혹 갈등을 주제로 워크숍을 진행하다보면,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고통을 듣게 된다. 양측 모두에게 문제를 발견할 수 있지만 사용하는 사람들마다 비언어를 다르게 사용하는 데 문제는 더욱 컸다. 언어는 사전적인 의미 외에도 다른 뜻을 포함하고 있어서 비언어적 차원의 신호를 익히기 위해서는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 훈련이 된 사람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내 말을 남이 이해하기를 기대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하느님과의 관계도 본디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만나고자 하신다. 말씀은 우리가 그 분을 만날 수 있는 통로이다. 누구든 하느님에게 말씀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치유 받았으며 말씀으로 회개하게 하셨다. 그 분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거룩한 영역으로의 접근을 허락하셨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요 1,1)'

 

말씀은 하느님의 언어이며 하느님의 전부일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과 가까이 가기 위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만나야 한다. 그분의 언어를 만나야 한다. 하느님의 언어 말씀은 많은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 동전의 한쪽 면만을 보여주지 않고 통합적인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때문에 한 말씀만 들어도 ‘내 영혼이 나으리이다’는 고백이 가능해진다. 

 

또한 말씀은 본래 음성적인 영역만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소리는 시간의 제약과 공간의 제약을 받기 마련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이를 뛰어넘는다. 때로는 비언어적인 요소를 대부분 반영하기도 한다. 때로는 이미지로, 느낌으로, 감촉으로 다가온다. 영상으로 오기도 하며 지나가는 바람결에서도 깨달음이 울려 퍼진다. 그래서 말씀은 우리를 진리로 초대한다. 말씀은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곧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은 말씀을 ‘말숨’이라고 하고 이렇게 설명했다. 
 

'숨의 마지막이고 죽음 뒤에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말숨 쉼은 영원한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말숨을 생각하는 것은 영원을 생각하는 것이요. 말숨이 곧 하느님이기도 하다(다석 유영모 어록 26p)'

 

말씀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는 나의 주파수를 하느님 방송국으로 맞추어야 한다. 우리가 누군가의 말을 듣기 위해서 뒤돌아서면 안된다. 방향을 바꾸고 그 분 앞에 눈을 맞추고 있어야 한다.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시 85:10) 있어야 하며 ‘내 눈을 들어 당신을 쳐다보아야’(시 123:1) 울려 퍼진다.

그래서 우리는 성무일과를 드린다. 나의 자세를 하느님께 맞추기 위한 장치이다.  한 처음의 말씀이 시작되어야 우리는 생명을 얻고 빛을 얻게 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기쁨이란 그 말씀을 만나는 것이다. 그 말씀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셔 우리에게 오셨듯, 말씀도 모든 사람들에게 울린다. 기다리라.

 


#위에 사진은 사순절 묵상집 나눔 사진입니다. 나누는 자리, 언어를 나누지만 삶을 나누고 신앙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언어란 본래 그런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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