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베발탑과 성령강림 사건
언어에 관하여 시리즈
1) 한 처음, 말씀 2) 바벨탑 사건과 성령강림 사건 3) 예언자들의 언어 4) 기쁨의 찬양, ‘시편’ 5)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 6) 바울의 서신들 7) 요한 묵시록의 언어 8) 완전한 언어, ‘사랑’
위와 같은 순서로 언어에 관한 시리즈를 기획합니다. 이 시리즈는 성서에 근거하여 일상의 언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기획의도를 맞추고 있습니다. 때문에 언어학적인 관점이나 철학적인 접근이 이루어질 것이라 상상하지 못합니다. 다만, 성찰을 이어갈 수 있는 중요한 키워드로 ‘언어’를 삼을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신의 입자를 찾아서’(이종필, 마타출판사, 2015년) 책의 서두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세상은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모범답안으로 평가받는 입자물리학 표준 모형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던 힉스 입자를 찾기 위해 지난 2012년 대형강입자기(LHC)를 재가동한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힉스입자란 무엇일까.
힉스 입자는 양자물리학으로 본 세상에서 물질에 질량을 부여하는 요소다. 세상의 물질을 쪼개고 쪼개면 결국 물질과 반물질의 관계를 발견하는데, 이들을 불균형맺게 하는 것이 힉스입자이며 ‘신의 입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불균형으로 존재하게 하는 입자니만큼 신의 섭리를 파악하기 위한 단초로 이해할 수 있다. 물리학과 신학이 만나는 지점이다. 관계라는 말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리스도교는 관계의 종교이다. ‘나는 누구인가’ ‘하느님은 누구인가’는 기도의 첫 시작에 중요한 질문이다. 그 답변에 따라 관계를 인식하고 진리에 접근하다. 진리란 그리하여 ‘여기, 오늘’의 상태에서 시작한다. 관계란 날마다 상태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언어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관계를 빼놓고는 그 본질을 파악하기 어렵다. 언어의 목적이 ‘소통’이라고 할 때 그 목적은 관계를 배제한 채 이루기 어렵다.
관계를 조정하는 입자가 마지막 입자로 밝혀졌는데 그 입자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아주 놀라운 기술이 필요했다. 그 기술을 실용화한 대형강입자기. 그 실체는 사실 어마어마했다. 우리가 하느님의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다 내려놓고 앉아야 한다. 이 또한 어마어마한 도전이다. 나의 무엇도 가지지 않은 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자음과 모음의 나열만으로는 언어라 부르기 힘들다. 또는 음성과 문자만으로는 대화가 이루어지기 힘들다. 조합되어 의미를 지니기까지 보이지 않는 작용이 있다. 그 작용은 주고받는 이의 마음의 교차 즉 관계를 들여다봐야 한다. 서로가 서로의 일치를 위해 소통하며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갈 때 우리는 이를 공동체(communion)라 부를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통해서만이 완성되는 것이다.
관계를 통해 완성되는 언어를 통해 우리는 나를 드러내고 타인을 만난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느님을 인식하기에 이른다. 하느님은 나의 언어 속에서 존재한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늘 완벽한 것은 아니다. 서로의 말 때문에 혼란을 겪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성경적으로 바벨탑과 성령강림사건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바벨탑 사건은 내가 꼭대기까지 쌓아둔 탑으로 상대의 언어가 전혀 해석이 안 되는 경우다. 갈등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아무리 설명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경우도 종종 있다.
당장 땅에 내려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 놓아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창세기11:5~9)
우리가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이 언어를 섞어놓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욕심 때문에 쌓은 탑으로 인한 업보다. 살면서 우리들은 견고한 탑을 쌓는 일에 주력한다. 대부분 그 탑의 높이가 나를 결정하며 견고함으로 그 사람의 됨됨이가 평가되는 경우는 종종 있다. 그런데 그 탑으로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 못하기도 한다.
그래서 소통의 어려움을 겪을 때 탑을 허물고 성령강림의 사건이 우리들에게 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려야 한다. 성령강림의 사건은 승천 후의 선물이다. 다른 이를 이해하는 신비가 그의 선물인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기다림이었다.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 예루살렘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경건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 소리가 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사도들이 말하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자기네 지방말로 들리므로 모두 어리둥절해졌다.(사도행전 2:4~6)
성령강림의 사건은 같은 자리에서 기다릴 때 있었던 일이었다. 입장을 같이 하고 하늘에게 뜻을 구할 때 이루어졌다. 그 관계의 온전함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들의 온전한 관계는 ‘같은 기억’을 기반으로 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경험했고 기억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온전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이 수난의 시기에 바랄 것은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서로의 기억을 확인하고 기다리는 일이다. 서로는 서로로 더욱 풍성해지며 강화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와 같은 사실을 믿기에 서로를 거울삼아 보고 듣고 나눈다. 하느님의 존재란 또한 나의 기다림 속에서 그들과의 소통 속에 오는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