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에 관하여
3) 성서 예언자의 언어
언어에 관하여 시리즈
1) 한 처음, 말씀 2) 바벨탑 사건과 성령강림 사건 3) 예언자들의 언어 4) 기쁨의 찬양, ‘시편’ 5)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 6) 바울의 서신들 7) 요한 묵시록의 언어 8) 완전한 언어, ‘사랑’
위와 같은 순서로 언어에 관한 시리즈를 기획합니다. 이 시리즈는 성서에 근거하여 일상의 언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기획의도를 맞추고 있습니다. 때문에 언어학적인 관점이나 철학적인 접근이 이루어질 것이라 상상하지 못합니다. 다만, 성찰을 이어갈 수 있는 중요한 키워드로 ‘언어’를 삼을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최근 교회 봄 신앙도서강독회의 주제를 ‘비폭력대화’로 잡고, 작은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조직 내의 사람들 간의 갈등이 안타까워 시작한 이 소모임은 우리를 풍요롭게 했다. 알 듯 모를 듯 우리의 대화는 이제 2회기를 맞이했지만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 즉각적인 피드백이 없었다. 자기 고민이 더 깊어져서 그런 것일까. 누구나 명쾌하게 자기 안으로 들어가기 쉽지 않아 했다. 습관에서 이루어진 말들이 얼마나 많은 갈등을 일으키는 지 우리는 알고 싶어했다.
“나를 더 많이 드러내야 할 것 같은 두려움이나 낯설음이 있어요. 자꾸 소통 방식을 이야기 하는데 나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어요. 제가 무슨 문제가 있는걸까요?” 2회기 모임에 참가한 한 명의 고백이다. 메샬 B가 소개하는 비폭력 대화는 언어가 어긋난 관계를 다시 푸는 데 좋은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점점 자기를 드러내는 것 또한 ‘언어’라는 것을 우리는 발견했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해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거기에는 온전한 느낌과 사실이 담겨져 있으며 욕구나 바램도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갈등은 아주 쉽게 발생할 수 있다. 갈등은 비극적인 상황을 나타내기도 한다. 성서에서는 어떠했을지 우리는 성서 속을 들여다보고 내 일상에서 적용해보려고 한다. 그 중 한 분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예언자들의 언어다. 그들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려고 애썼다. 때로는 그런 이유로 죽게 될 지라도.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올 것입니다.”(이사9:1)
희망을 바라보는 그들은 메시아를 만나기를 갈망하고 갈망했다. 그래서일까. 누구보다 하느님과의 소통은 그들의 언어 속에서 묻어나며 외로움과 짙은 갈망이 담겨져 있다. 누구보다도 하느님과 소통을 원하며 민족과 하느님을 연결하기 위해 애썼다.
시대의 슬픔을 읽는 그들 ‘성서의 예언자’. 보이는 것은 고통이다. 시대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늘 고통이 따르는 일이었다. 여기서 잠깐 예언자들에 대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성서의 예언자들은 미래의 일을 말하는 사람들이라기보다 대언자(代言者)이다.(pro-phets). 앞날을 미리 예견하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을 대신해서 선포하는 사람들이어서 그들은 철저하게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일에 몰입했다.
그리하여 그들을 부르는 히브리어 ‘나비’(nabi/navi)는 ‘부름받은 자’, ‘알리는 자’라는 뜻을 지녔다. “야훼께서 말씀하시길…” 이라는 것은 자신은 침묵하고 하느님이 말씀하시도록 돕는 자리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들의 언어는 독특하다.
구약 전반을 차지하는 500년의 역사를 흐르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의 언어를 다 한 마디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지만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뜻과 멀어진 그 시대를 돌이킬 결단을 전달해야 했다. 분명히 목적을 둔 바램을 담고 있었다. 누구를 해치고 싶거나 자기 확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그리고 민족을 구원하고 싶은 갈망이었다.
그들은 모두 새 시대를 향하고 있으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느님과 인간의 갈라진 관계를 회복시키고 싶었다. 또한 그들의 바램은 행동으로도 드러났다. 예언자들은 심심치 않게 기인행각을 벌였다. 그러한 행동을 두고 현대의 심리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은 정신분열증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실은 예언자들의 독특한 행동은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예언자들의 이상한 행동은 일종의 상징적인 행동이기도 하며 알리기 위한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구체적 상황 가운데서 예언을 선포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의 말씀은 항상 특정한 역사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예언자마다 지식과 경험, 신학사상에 따라 개성 있는 예언을 선포했다.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예언자의 본분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예언자의 구체적인 인격을 통해서 선포되는 것이었다.
예언자들의 언어는 하느님과 연결시켜주고 있다. 그들은 언어를 나를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보다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했기 때문이다. 암울한 시대에 희망은 언어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즈음, 나는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가 되묻게 된다. 공의의 하느님을 받아드려 자기의 인격을 통해 전달한 그들의 언어에서 나를 돌아보게 된다. 평화로 잇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철저한 자기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하느님의 눈으로 시대를 읽고 말하자. 그것이 우리를 구원할 ‘언어’이다.
* 사진은 웹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