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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에 관하여 5)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

작성일 : 2017-04-22       클릭 : 231     추천 : 0

작성자 원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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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에 관하여
 
5)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

 

유달리 못 알아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국어가 아닌 경우가 그렇습니다. 억양이나 단어 하나 하나 생각하다보면 그 문장 전체의 의미란 어느새 너무나도 멀리 지나갑니다. 말은 단어의 조합이 분명한데 하나 하나에 집중하다보면 더 못알아듣습니다. 그런데 모국어인데도 못 알아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서로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때 그렇습니다. 저는 이 경우 ‘경험이 다르다’라고 봅니다. 경험이 다른 건 사실 언어가 다른 것입니다. 억양이나 단어들이 나와 다른 것을 떠나서 각각 서로의 시각을 맞추지 않다보면 이상하게 들리기 마련입니다. 이럴 경우 ‘주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옛날에 두 아저씨가 살았어요. 윗 마을 길아저씨네, 아랫 마을 손아저씨네. 길아저씨는 두 다리가 불편했어요. 손 아저씨는 날 때부터 앞이 보이지 않았어요. 세월이 흘러 길 아저씨, 손 아저씨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어요. 이제 두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손 아저씨는 다행히 지팡이를 짚고 더듬 더듬 밖으로 나갈 수 있었어요. 바가지를 들고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끼니를 동냥해 먹었어요. 어느 날, 할머니네 구걸하러 갔을 때 할머니가 말했어요. ‘딱하기도 하지. 하지만 윗 마을 길씨네보다 괜찮아. 두 다리를 못 쓰는 방안에서 꼼짝 못하고 있으니까.’ 손 아저씨는 길 아저씨한테 데려다달라고 부탁했어요. 둘은 서로 어려운 형편이라 마음이 금세 통했어요. 서로 도우며 살아가기로 했어요. 길 아저씨는 눈이 멀쩡하고 손 아저씨는 다리가 멀쩡했으니까요. 그날부터 길 아저씨와 손 아저씨는 한 몸처럼 지냈어요.” (길아저씨, 손아저씨/권정생 지음/국민서관)


서로의 다른 처지를 통해 길 아저씨와 손 아저씨는 결국 새로운 장사를 시작할 수 있었고 장가도 들어서 나란히 집을 짓고 잘 살아가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행복하게 끝나는 이 동화를 잘 들여다보면 서로의 처지가 다를 때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배울 수 있습니다. 서로 통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필요에 대해 깊이 공감해야 합니다. 길 아저씨 손 아저씨처럼 말입니다. 이런 행복한 동화 속 이야기를 성경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함께 마음을 합하여 뜻을 이루는 경우입니다. 둘의 아픔이 있지만 결국은 그러하게 되는 경우지요.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은 사실 예수님이 옆에 계실 때 스승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가르쳐주시는 말씀도 낯설었으며 그 말씀 속에 깊이 머물지 못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베드로입니다. 첫 번째 제자였고 예수님의 친구였는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옆에서 늘 머물었지만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최후의 만찬 중에 결국 못 알아듣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오늘 밤 너희는 다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도 베드로는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마태오 26:31-35)라고 장담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왜 죽으려고 하시는 지, 그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돌아가신 무덤가에도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기도 합니다. 토마는 손가락을 넣어보고야 믿게 됩니다. 길을 걸을 때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드디어 그들의 눈이 열리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 모든 일을 겪고 나서입니다. 그분과 동행하고 그분의 수난과 부활을 경험하고 나서야 스승의 뜻을 알게 됩니다. 부활한 예수께서 패배감에 빠진 시몬 베드로가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물고기를 잡습니다. 그러자 그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세 번이나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말입니다. 세 번 다 물을 때까지 베드로는 스승의 말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의 마음속에 진정으로 예수님의 말씀이 와 닿습니다.

 

그러니 그에게 새로운 삶이 펼쳐집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는 예수님의 진정 어린 당부도 듣습니다. ‘내 양들을 너에게 맡기니, 너도 그 길을 가거라’ 하시고 그 분은 사라지십니다. 결국 베드로는 그 분의 말을 그 때서야 분명하게 이해하신 것입니다. 그 오랜 사랑의 결실이었을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이 행하신 똑같은 기적을 행하십니다. 성전 문 옆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고칩니다.(사 3장) 그리고 그 분과 같은 길을 걷습니다. 가장 기뻐하실 분은 예수님 아니셨을까요.

 

제자들과 소통이 어려워 예수님은 외로우셨을 것입니다. 그 때 분의 방식을 봅니다. 삶을 공유하고 말씀을 증거하십니다. 그들이 겪게 하고 기다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세상으로 나갈 선교를 시작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있었기에 복음은 제상에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언어의 소통이란 사실 제자들이 경험한 것처럼 마음 문이 열리고 경험이 공유될 시간이 필요합니다. 수난과 부활을 온전히 지난 지금 부활 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을 겪고 나서 내 자리를 볼 때만이 온전히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혹여나 누군가와 소통이 어려워 힘들지 않기를 빕니다. 예수님도 한 명의 제자도 옆에 두지 못한 채 돌아가셨지만 결국은 그 역사를 증거한 것은 못 알아듣는 제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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