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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에관하여 6)바울의 서신들

작성일 : 2017-04-29       클릭 : 319     추천 : 0

작성자 원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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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에 관하여 시리즈
6) 바울의 서신들

 

 

아이와 아침부터 한바탕 전쟁을 치뤘다. 늦어진 등굣길이 불안한 애린과 할 일을 다하고 가라는 엄마의 실강이로 감정이 끝까지 치솟았다. 울면서 간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선생님에게 정중하지만 마음을 살펴달라는 메시지를 하나 넣어놓고 미안한 마음을 달래본다. 내 이야기지만 사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글로 적을 때는 훨씬 수월하게 마음을 전하게 된다. 직접 얼굴을 마주하지 않으니 고려할 상황이 내 마음과 내 의도인 것이다. 상대방에 따라서 할 말을 못하고 돌아오거나 전달과정에서 오류가 줄어드는 것이다.

 

지금처럼 전화가 보편화되기 전에 이야기를 들어보면 편지는 그 역할을 참 많이 했던 것 같다. 짝사랑하던 그 사람을 잊지 못해 밤새워 적어내려간 글은 아무도 몰래 아침에 전달될 수 있었다. 상대방이 그 글대로 응할지 안 응할지 모르지만 일단은 방해없이 내 마음을 표현하고 내 의도를 들어내는 데 글이 말보다 더 편안한 것이 맞다.

 

편지는 글로 전달하는 마음이다. 편지의 시작은 받는 사람에게며 맨 마지막은 그 마음을 보내는 이로 끝나는 것이 특징이다. 나에게서 시작한 마음이 그에게 닿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때때로 그 형식은 다르지만 중요한 것은 내 의도가 전달되는 매체가 ‘글’이라는 것이다. 성서에서도 편지글이 중요한 역할을 할 때가 있었다.

 

처음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은 복음서를 만들지 않았다. 예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이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설교를 들어봤던 또한 기억을 가진 이들이 살아있을 때에는 예수의 ‘말씀’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를 알고자 하면 오히려 바울의 편지들을 읽어야 했다.

 

예수를 전하기 위해 적혀진 이 글들은 모두 그의 신앙에서 우러나온 경험이며 그의 어투가 담겨 있다. 그는 공동체의 식별을 위해 더불어 살아가며 보다 예수에게 가까이 가고자 애쓰는 많은 공동체를 위해 이 글을 썼다. 바울의 삶을 잠깐 들여다 보면 서신들의 언어를 이해하기 더욱 쉽다.

 

바울로 이름을 바꾸기 전, 사울은 성경에서 첫 순교자 스데파노의 순교 현장에 등장한다.(사도7:58) 사울은 스데파토를 죽이는 일에 찬동했고 예루살렘 교회를 쓸어버리기 위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남녀를 가리지 않고 끌어내어 모두 감옥에 처넣었다.(사도 8:1-3) 짐짓 그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반대되는 입장에서 살아왔는 지 잘 알 수 있는 장면들이다. 믿음있는 이들을 잡아 넣는 사울, 그는 다마스투스 가까이에서 예수를 직접 만난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하니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는 음성을 듣는다.(사도 9:4-9) 예수를 만난 이들은 자기 존재를 바꾸며 살아간다. 그것은 숙명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도 달라졌다. 가장 박해하던 사람에서 가장 열심히 증거하는 삶으로의 변화 그것이 그의 글들 속에 나와 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 둡니다. 이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나에게 계시해주신 것입니다. 내가 전에 유다교 신자였을 때의 소행은 여러분이 다 들었을 터이지만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였습니다. 아니, 아주 없애버리려고까지 하였습니다.’(갈라1:11-13)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적어 내려간 글들은 바울의 진심어린 마음과 닿아있고 자기 고백적이어서 감동을 준다. 글로 읽는 설교들인 것이다. 가장 감동깊은 설교는 자기 고백 깨달음에서 이루어진 글이라고 믿는 나로써는 바울의 글들이 깊은 감동과 전파력을 갖는 것은 이 대목의 힘이라고 믿는다. 자기 깨달음에서 오는 이의 말은 다른 이들에게도 깨달음으로 이어지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의 형제들을 돕고자 하기에 그의 글들은 다정하며 사려깊다.

 

곳곳에 교회들을 사랑하고 그 안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노력했던 바울. 그의 글들은 초대 교회를 세우고자 얼마나 애를 썼는지 잘 나와있다. 그에게 그 역할이 맡겨졌던 것은 조정자가 아니었을까. 전도여행과 사역을 통해서 그는 그 조정을 글로 해나간 것이다. 지금도 그리하여 신앙의 갈등을 느낄 때, 삶의 어려움을 가질 때 서신들은 힘을 가지며 읽혀지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를 직접 만나지 않은 이들에게 모습을 상기시키며 그의 복음을 자기 언어와 자기 삶으로 전한 서신들은 그래서 지금도 성서정과에서 빠지지 않고 낭독되며 사람들에게 애독되고 암송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 글들은 바울이 쓴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삶과 시대적인 배경을 감안하여 해석해야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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