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에 관하여
7) 요한의 묵시록의 언어들
요한의 묵시록은 독특한 필체로 서술되어 있다. 첫 장 첫 절에서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일들을 기록한 책입니다.’라고 말하며 독특한 필체를 설명하고 있다.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적었기 때문에 해석 없이 읽으면 신앙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구석도 있을 수 있다. 현실이 아닌 듯 보이는 장면도 속해 있다. 일반적인 신학적인 해석이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단들이 가져다 쓰는 구절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어떻게 읽어야 할까?
신앙인들은 누구나 자기 언어 안에서 하느님을 만난다. 그 언어는 각각의 독특한 세계이자 세상과 연결된 통로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느님이 한 언어에 갇힐 수는 없지만 모든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 자기 언어로 깨달을 때만이 가장 밀접하게 하느님을 느낄 수 있으며 가장 사무치게 구원의 문을 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들은 보편적인 언어로 표현되기 보다는 자기 안의 독특성으로 접근한다.
따라서 자기 언어나 표현이 막혀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만나기가 어렵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21:1)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치유 프로그램들은 모두 자기 표현의 창문을 여는 통로이다. 요한 묵시록의 표현대로라면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새 예루살렘이다.(요한묵시록 21장) 누구나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킬 수 있다.(루24:50-53)
자기 표현이 열리면 그 언어로 임재하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자기 안의 세계로 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내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고 그리스도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과정이다. 실상, 말이야 대칭적인 구조를 가지는 듯 보이지만 내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기란 선뜻 이루어지지만 그리스도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리스도의 존재가 너무나도 크게 받아들이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나의 초라함과 나의 부족함을 느끼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분명 나를 통해 세상의 문을 여셨다. 그 문고리는 내가 여는 것이다. “들어라. 내가 문 밖에서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3:20)
나의 언어와 나의 표현으로 그 분을 만나게 된다. 나는 나의 언어로만 그 분을 소개할 수 있으며 내 색으로 그 분을 만나기 마련이다.
세상이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여 자기 색이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초록은 분명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지만 우리가 그 초록을 얼마만큼 알아 들을 수 있을 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 자기 언어 다양한 초록으로 자기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초록이지만 각각은 다 다른 초록이며 때로는 다른 빛깔이 풍성함을 더해주고 있다. 그 초록이 어느 하나 정답 아닌 것이 없다. 또한 초록은 현존을 설명한다. 그러기에 자기 색을 가진 초록이 계절을 대표하는 것이다.
풍성함이란 다양한 언어와 상황을 통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마지막 도착점이다. 성경의 맨 마지막 정경인 요한 묵시록은 기존의 성경들과는 다른 언어로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전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요한 묵시록을 읽으면서 혼돈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 느낄 수 있지만 짐짓 우리의 얻을 수 있는 열매는 ‘다양함’이 될 것이다. 요한 묵시록은 세상의 종말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종종 읽고 나서 공포스럽거나 두렵게 되기도 한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성공회에 새롭게 들어오신 많은 분들이 매번 인용하는 목사님의 성경구절은 ‘요한의 묵시록’이었다고 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해 쏟아놓은 구절들이 때로는 두려움을 조성하고 매번 설교 없이는 이해불가능하기 때문에 경청해야 했었다고 했다.
어쩌면 사실은 설교를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신자들의 강력한 회심이나 성령체험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요한의 묵시록은 주님과의 대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해석하거나 앞 뒤 상황을 빼고 아전인수격인 해석은 위험하기도 하다. 또한 역사적이나 사실로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곳에서 이야기하는 세상은 분명 내 안의 세상인 것이다. 마치 창세기를 역사적 사실로 읽을 수 없듯이, 요한의 묵시록도 사실로 읽는 다면 이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는 기도 안에서 읽어야 한다. 기도하는 사람이 받아들이기 좋게 서술되어서다. 기도 안에서 해석하고 기도로서 이야기해야 한다. 그래도 사람들에게 적용할 때는 마치 자기 말만 옳다고 하는 편견에 사로잡히기 쉽다. 조심해야 한다. 마지막 장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주 예수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내리기를 빕니다.”(22:21) 결국 성경은 다른 누군가에게 계시를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세계에 은총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은총을 빌고 또 빌어야 한다. 그리하여 새 세계는 다시 창조된다.
“지금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1:8)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존재이다. 나는 죽었지만 이렇게 살아 있고 영원무궁토록 살 것이다.”(1: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