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에 관하여
8) 완전한 언어, ‘사랑’
우리가 활동할 때 가장 기초적인 기반은 ‘사랑’이다. 내가 움직이고 살아 있고 숨쉬는 그 기본적인 활동의 모든 토대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모를 때 사람들은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다. 때로는 사랑의 넘침으로, 때로는 사랑의 결핍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미움과 고통을 주기도 한다. 그것의 다른 면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사랑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도 그렇다. 사랑의 절정에 순간에 생명은 잉태되기에 존재는 사랑으로 시작한다.
자기 존재에 대해 깊이 성찰한 바 있는 이들은 잠깐의 대화 속에도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얼굴을 마주보고 나누는 대화 속의 그의 영혼에 가득찬 사랑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은 누군가를 포섭하거나 장악하려 하지 않으며 서로의 거리를 인정하고 존중하려 한다. 섣부르게 자기 주장을 관찰시키거나 자기 표현을 과하게 하여 남의 기회를 망치는 일이 드물다.
자기가 드러날 때는 빛나게 자기가 누군가를 위해 배경이 되려할 때는 사라지는 일을 자처한다. 예술 속에서도 이런 드러냄과 감추임은 그 예술성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 본 그림이 드러나도록 여백이 배치되어야 하며 음과 음 사이의 절정은 쉼표로 이루어진다. 흙과 흙 사이에 공간이 있어야 비로소 양분과 물이 흘러 건강한 흙이 되고 작물이 잘 자랄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말도 마찬가지다. 가장 뛰어난 언변가는 경청가일수 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며 상대방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말을 전달하는 것, 그것은 경청 없이는 불가능하다. 최근의 말 훈련법들이 발음이나, 기술 등만을 강조하는 것을 보는 데 이에 나는 다른 입장이다. 가장 기쁜 상태는 들을 수 있는 귀를 통해서 시작된다.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그들을 들을 수 있도록 바꾸는 것, 그것은 연설가의 마음 자세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본질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 마음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를 ‘사랑’으로 집중하게 한다.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 이어지는 마음은 ‘사랑’이다. 본질적으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요한1서 4장 7~21)를 전달하기 위한 과정 가운데 생겨난 일들의 기록이다. 그래서 실제로 내용의 사실 여부를 떠나 성경을 읽는 자는 사랑을 느끼고 비로소 변화하게 된다. 이제 막 성경을 읽기 시작한 사람들의 고백을 종종 듣는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었어요. 처음 보는 것 같아요”
그 말은 분명 사실이다. 구절이 나에게 다가와 내게 말을 걸고 나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첫 번째 사건을 겪은 자들은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 언어가 담고 있는 신비란 이런 것이다. 성경은 어떻게 보면 모순 투성이며 폭력적이고 반인권적이고 반여성적인 경우도 있다. 때로는 이를 분석적으로 보거나 역사적 사실을 따지다 보면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텅빈 공(空)을 경험한다.
그런 분석은 사실이다. 진리란 비어있음이기 때문이다. 비어있기에 무엇이든 채워놓을 수 있는 상태가 진리이다. 하느님 안에 내가 들어갈 수 있다는 엄청난 사실 말이다.사랑이란,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라고 나는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진리와 사랑은 상통하는 의미이다. 그래서 진리의 언어는 사랑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다. 때로는 성경을 남을 단죄하는 구절이나 억압하는 도구로 자기 멋대로 짜 맞추는 이들을 볼 때도 있다. 그것은 하느님의 목적과는 거리가 멀다.
창세기에서 요한묵시록까지 성경을 구석구석 살피며 ‘언어에 관하여’ 시리즈를 진행해봤다. 쉽지 않은 글들이었다. 언어학자도 아니며 신학전문가도 아닌 내가 언어에 대해 논의한다는 것은 어쩌면 무모한 시도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성경을 읽는 눈은 새로운 눈이라는 사실이다. 새로운 눈은 물질이나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바가 아니다. 오히려 눈을 감고 자리에 앉아서 기도함으로 뜨는 눈이다. 새 눈이 있어야 볼 수 있는 진리는 성경 곳곳에 감추어져 있다. 숨어 있는 눈을 뜨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 분의 사랑에 다가가야 한다.
그 분의 사랑은 한이 없으시기에 나의 삶과 맞닿아 있다. 그는 창조물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모든 이들에게 은총을 골고루 나눠주신다. 그 은총을 받는 이들은 모두 생명력을 가지게 되며 서로 사랑하라는 말대로 내 이웃에게도 사랑을 나눠준다. 우리가 애닯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하느님을 믿으세요’라고 하는 까닭은 그들에게 내 종교를 강제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랑’을 옮겨주고 싶음이다.
사랑은 무한하며 우리를 치유하고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 그로 인해 모든 것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기적의 순간이 찰나에서 영원까지 펼쳐지는 것이다. 모두에게 그 사랑이 가기를 빌고 또 빌며 긴 시리즈를 마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