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내규 요나 신부/ 정읍교회
오늘은 주의변모 축일입니다. 변화산에서 주님의 모습이 영광스럽게 빛나는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감동하여 그날과 그 장면을 특별한 기억 속에 남기고자 하는 날입니다.
후광을 드리우며 순백의 모습을 한 예수님의 모습은 그가 고귀한 하느님의 성자임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는 귀한 사건으로 비쳐집니다. 전통적인 해석 역시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십자가 죽음의 걸림돌을 극복하도록 제자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려는 목적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성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에게는 삶이었는데, 우리는 그분의 모든 행동을 종교적 행위로만 이해하려고 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그 분에게는 눈물 나는 아픔이었던 일을 ‘그분은 우리를 위해 아파해야 하는 것이 당연해’ 라는 종교적 합리화로 바꿔버리지 않았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은 얼마나 예수님을 경배하는가? 라기 보다는 어떻게 예수님과 합일 하는가? 라는 물음에 가까이 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허공이 아닌 땅에 뿌리박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잡혀 십자가에 돌아가신다는 첫 번째 수난고지와 두 번째 수난고지 사이에 등장하는 일화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반역죄 또는 선동죄 등으로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알려준 것이 아니라, 백 명 이상 모이는 집회를 할 수 없다는 로마의 영주령에 따라 예수는 이미 생명을 위협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벌써 5천명이 모이는 집회도 열었고,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그에게 새로운 복음을 듣고자 몰려들었기 때문에 헤로데는 늘 예수님을 주시하고 있었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뒤흔든다고 생각하는 이스라엘의 종교지배자들은 예수를 가만히 두어서는 안된다고 단단히 벼루고 있던 차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때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생명의 위협을 받고, 적대자들이 나를 밀어붙일 때 굳건히 앞을 향해 가실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많은 시간을 하느님께 기도하고 간구했습니다. 오늘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며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모세와 엘리야를 보내주셨습니다.
고난의 길을 먼저 걸어왔던 그들과 대화하며 예수께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천명(天命)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시련의 길을 담대하게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그의 결단이 어찌 빛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처음 이 길을 가겠다고 결단하던 세례의 순간에도 하느님의 사랑스런 음성이 들려왔듯 죽음의 길을 담대히 가겠다고 결단하는 이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예수님을 응원합니다.
신성을 담은 예수님이기에 빛이 나는 변모가 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기꺼이 그 고난의 길을 가시기로 결단하는 그 모습이 성스럽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변모 사건은 주님에게만 일어나야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처럼 변했던 이들을 우리는 성인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거룩한 결단을 통해 고난의 길에 동참했던 이들입니다. 우리도 그 길을 걸을 때 세상을 환히 비추는 거룩한 빛이 날 것입니다. 서로가 그 빛을 보며 축복하는 날이 어서 오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