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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대학교 100주년 기념 신학특강 1

작성일 : 2014-05-03       클릭 : 435     추천 : 0

작성자 약수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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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대학교 100주년 기념 신학특강>

 

한국과 세계성공회의 한 세기 (1914-2014)”

(Korea and A Century of the Anglican Communion, 1914-2014)

 

Terry M. Brown 주교

토론토 Trinity College University

캐나다 성공회

 

강연 : 2014428, 성공회대학교.

 

 

서론

 

먼저, 모든 분들게, 특히 이재정 신부님께 감사함을 전하며, 성미가엘 신학교, 현재 성공회대학교의 한세기 역사와 관련지어 세계성공회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한국에서도 교회나 기관이 세계와 격리되어 살지는 못하기 때문에, 제가 역사와 병행시켜 말하는 것도 매우 유용하리라 생각된다.

 

네가지 영역에서, 과거 한 세기 동안 세계성공회의 역사를 보기로 하겠다: (1) 식민주의, 흡수합병, 탈식민화와 자치; (2) 평신도 세례 사목, 교단주의와 에큐메니칼 운동; (3) 이데올로기, 그것이 자본주의이든, 맑스주의이든, 주체사상이든, 신자유주의든, 서구의 포스트모던이든; (4) 평화만들기와 화해 (여기서 한반도 평화를 담고싶다). 아마도 나의 강연 주제는 과거나 현재의 식민주의, 교단주의, 거짓 이데올로기, 전쟁 등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을 말하고 싶다. 여기서 교회적 관심, 세례 영역과 더 넓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관심 영역 이 둘 사이는 샌드위치로 끼어 있다고 하겠지만, 위에서 언급한 네가지 영역들은 중요하며 상호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우리는 세계와 직면하기에 앞서 교회부터 먼저 보기로 하자.

 

세계성공회와 식민주의 (1914-2014)

 

성 미카엘신학원은 일본이 한국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통제가 증대되는 상황에서 건립되었다. 1904년과 1907년 한국과 일본 사이에 조약들과, 그리고 영일동맹(영국-일본)1905년에 10년을 갱신하여 한국을 일본의 보호자로 만들었고; 1910822일 일본은 공식적으로 한국을 합병하고, 한국말과 문화와 정치적 열망을 억압을 시작하는 정책을 시작했다. 한국에 온 영국성공회 선교사들 (영국이 1차세계 대전 중에 일본과 조약을 맺었음에도)은 한국말과 문화를 매우 존중했다. 그것은 아마도 가령 F. D. Maurice (그의 The Kingdom of Christ 1권의 마지막 장에서) 같은 신학자들, 그리고 그의 후학자들이 반식민적 선교의 글들을 쓰기 시작하면서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한국 교회를 세우려했지, 일본이나 영국 교회를 세우지 않았다. 이처럼, 이때에 성공회신학교가 세워진 것은 일본 당국에 위협을 주기 시작했고, 19403월에 민족주의적 요인으로 인해 폐교했다. 전쟁 후, 한국의 민족주의적 열망은 교회와 국가 모두에서 승리를 했고, 여러분들은 이로인해 예배, 신학, 사목, 지도력과 교회 (신학적이고 세속적 모두)에서 한국 교회에 자랑을 갖을 것이다.

 

많은 악들을 갖고 있는 일본의 식민지화를 겪은 한국은 지난 한세기 세계 주변에서 많은 성공회 역사들과 나란히 가고 있다. 처음 영국교회는 영국에서 나와 채플린들, 예를 들어 군목 또는 인도의 동인도 회사(1600년에 세워진)의 채플린들을 통해 지구 남반으로 이동했다. 그것은 경제적 약탈이 첫 목적이었다. 1701년 영국의 USPG 선교단체는 해외에 영국 정착민들과 이들 지역에 토착민들 모두에게 선교사들을 보냈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영국 제국을 넘어서 활동했다. 1799년에 세워진 CMS는 유럽의 경건주의에 영향을 받은 성공회 복음주의인데, 세계 곳곳에 선교사들을 보냈다. 대부분의 초기 선교사들은 복음화하려 했던 문화들에 대해서 대단한 존경심을 가졌는데, 특별히 19세기 서구 제국주의가 고조에 오르면서, 다른 문화에 대한 존경은 인종적 우월주의와 모욕으로 자주 대치되었고, 그리고 이 인종들의 장례또는 흡수 계획의 일환으로 이러한 계획이 시작했다. 특별히 이것은 영국민이 정착한 곳(캐나다, 미국, 호주, 뉴질랜드)에서 그러했고, 아프리카나 태평양의 원주민들에게서도 있었다.

 

캐나다 교회는 과거 수많은 원주민 인디안 어린이들의 죽음과 신체적 그리고 성적 학대와 문화와 언어를 못쓰게 한 것 결과들을 야기시킨 원주민에 대한 식민적인 합병의 죄를, 지금도 정부가 세우고 교회가 운영하는 원주민 학교들에서 회복시키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유사한 흡수 정책은 2008년 호주 정부가 사과하면서, 소위 잃어버린 세대라고 하는, 원주민 어린이들의 입양을 통해서 원주민들에게 실시하고 있다. 그리고 식민지와 신식민지의 합병 정책들은 인도네시아의 자바 정부가 서 파푸아의 멜라네시아 (Melanesia) 원주민들에게도 계속 실시하고 있다. 한국이 과거 36년을 견뎌냈던 일본의 합병 정책은 세계에 원주민들이 경험했던 일이며, 지금도 분명하고도 기묘한 방법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유럽과 아시아의 식민주의에 대한 반응으로, 교회가 자주 관여되어 있거나 거기에 빠져있었기에, 성공회 지도자들은 지난 한 세기 넘게 식민적인 억압에 도전했던 원주민 지도자들, 선교사들, 그리고 사회 운동가들을 밝혀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성공회 성직자이자, 마하트마 간디의 친구이었던 Charles Freer Andrews (1871-1940)은 인도 독립을 위해서 지칠줄 모르게 운동했던 사람이다. 남 태평양에서는, 뉴질랜드 웰링톤의 Octavius Hadfield 주교 (1870-1893)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 정착민들인 마오리 족의 인권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변호했고, John Coleridge Patteson은 멜라네시아(Melanesia)의 퀸스랜드 설탕 농장에서 새 노동자들이 납치하여 첫 순교한 주교(1861-71)이었다. 최근에는 Walter Lini (1942-1999) 수사이면서 성공회 사제는 1980Vanuatu의 독립 국가를 위해서 프랑스와 영국에 반대하면서 독립운동을 펼친 지도자이었다. 이 지역에서 여성 선교사들과 종교 선교사들이 성직을 거부하고, 남성 가부장주의와 폭력, 식민지와 지역 모두에 반대하며 여성 인권을 주장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만약 저의 해석이 옳다면, 성공회대학교도 반 식민주의, 민족적인 자주, 그리고 비판적인 기독교인의 정치 이론과 실천이라는 성공회 전통에서 자신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실제로 성공회대학교들은 늦게 발전했는데, 그 이유는 성공회 선교사들이 엘리트들과 승리하고 겸손하거나 백성을 억압한 사람들보다는 민초들에게 다가갔기 때문이다. 이것은 식민 역사가 깊게 상처를 준 원주민들 속에서 세계를 향한 정의와 자주를 위한 투쟁이었다.

 

세계 성공회와 평신도 세례 사목 (1914-2014)

 

1914년 성미카엘 신학원이 세워진 같은 해 세계성공회는 지금 키쿠유 논쟁(Kikuyu Controversy)라고 하는 것에 휩싸였다. 오늘날 케냐에 키쿠유에서 스코트랜드 교회와 케냐의 Mombasa 주교와 우간다의 주교들 그리고 CMS 선교단체와 교단간 상호 선교회의를 가졌다. 이들은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과 함께 에큐메니칼 미사에 참여했다. ZanzibarFrank Weston 주교도 이들 두 주교를 파면한 것에 항의하여 켄터베리 주교와 영국 언론에 불만을 제기하여, 보편적 질서를 위반했다는 것에 강하게 저항했다. 이 갈등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날때까지 계속되었다. 돌이켜 보면, 이 논쟁은 주교직(주교 서품과 성사와 관련한 것을 포함해서), 성체성사에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견진성사, 그리고 세례의 본질에 관한 것이었다. 저는 그 시대에 한국의 트롤로프(Trollope) 주교가 Zanzibar 주교 편에 있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오늘날 성삼위의 이름으로 물로 세례하는 에큐메니칼의 합의는 성체성사에서 모든 참여에게 그리스도의 몸으로 예수 안에서 모든 구성원들에게 베품에 따라, 이 논쟁은 매우 낙후된 주제인 것처럼 보인다. 지금 제가 가장 나이 어린 어린이에게 세례를 줄 때는, 그 어린이가 성체성사를 받고 싶은지를 묻는다.

 

세계 성공회의 지난 백년은 기독교 신앙의 성체성사가 계속되는 중심 주제로 세례의 회복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교회에 어쩌다가 한번 갔다가, 견진 때까지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교단이 무엇이든지, 나이나 성별 또는 장애인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은총이 가득한 세례 사목은 지속적인 원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캐나다 성공회가 선교의 주안점으로 세례의 약속을 외치는 것은 모든 기독교인들, 평신도이든 목회자이든 세례 목회를 강조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례의 의미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새신자에게 가르치고 세례주고 양육하며, 예배를 사랑하게끔 인간이 원하는 바에 응답하며, 사회의 불의한 구조들을 변화시켜 나가며, 모든 종류의 폭력에 저항하고 화해로 평화를 추구하며, 창조의 보존을 끈질기게 지키고, 지구의 모든 생명을 지속시켜 나가는 것이다. 실제로 기초이자 근거가 되는 세례 외에도, 성직과 같은 은사(charisms), 종교 생활, 치유 목회 등으로 더 확장할 수 있겠다. 세례 목회는 근본적으로 에큐메니칼적이며 모든 기독교인들과 함께 관계성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 하겠다.


성공회의 과거 한세기의 역사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깊이 관여해 왔다. 에큐메니칼의 신앙과 직제 그리고 생명과 사역 운동들은 1948WCC를 만들면서 연결했다. 그리고 1961IMC(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이 합류했고, 성공회는 국가적 차원의, 지역적 차원의 에큐메니칼 모임들에 참여하는 방식을 취했다.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쉬에서 성공회는 연합교회 (United Churches) 형태로 들어갔기 때문에 교단적인 정체성들을 잃어 버리는 것을 선택했다. 중국의 성공회도 1950년대부터 삼자운동과 중국교회협의회(CCC, China Christian Council)dp 들어가면서 자신들의 교단적 정체성을 잃었다. 그래서 중국 성공회의 팅 주교(1915-2012)가 이끄는 -교단주의적교회를 만들었다. 반면 성공회 안에 한 분파인 앵글로-가톨릭은 이러한 연합 구조를 반대했고, 이를 부수는데 기여를 했다 (감리교와 함께하는 영국교회, 캐나다 성공회와 캐나다 연합교회, 호주 성공회와 호주 연합교회 등). 비록 가톨릭적인 성공회에서 조차도, 지금은 세례연합이 기독교 목회의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성사로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교단적인 장벽들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나의 질문은 성 미카엘신학교와 성공회대학교가 성공회의 정신을 1914년에 키쿠유 논쟁으로 나쁘게 시작한 에큐메니칼 정신에 얼마나 많이 반영시켜 왔는가를 보고 싶은 것이다.

 

세계 성공회와 이데올로기 (1914-2014)

 

영국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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