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공회가 소개된 것은 중국에서 파송된 중국인 전도사 두명이 김해를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 일대에서 교리와 신앙을 전파하면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당시 노력의 결과로 영국성공회에 의하여 한국선교가 결정되고 1889년 11월 1일 영국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조선 교구의 첫 교구장으로서 고요한 주교(Charles John Corfe)가 주교 서품을 받고 동역자들과 함께 1890년 9월 29일 인천항에 도착하면서 한국 선교의 깃발을 올렸습니다.
이 땅에 첫발을 디딘 선교사들은 의료선교를 시작으로 서울에 성베드로 병원과 성마태 병원, 인천최초의 양의 병원인 성누가 병원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아원을 1893년 서울 정동에 설립하는 한편, 선교활동을 위한 성경의 번역과 출판은 물론 신앙서적을 발간하는 문서선교를 전개하였습니다.
강화와 수원 진천 등지에 진명학교 또는 신명학교로불리워지는 초등학교를 설립, 1914년에는 성직자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성미가엘신학원(현재 성 공회대학교의 전신)을 설립하였습니다. 또한 수도회로서 성가수녀회는 1925년에 설립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1900년에 본격적으로 건축한 강화읍 성당은 전통적인 한국의 사찰형식을 빌어온 최초의 토착화 성당이었으며 이러한 한국건축양식의 교회로서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성당은 강화온수리, 청주, 진천 등 여러 곳이 있습니다. 이러한 건축양식은 성공회가 처음부터 지켜왔던 토착화 신학의 표현이었습니다. 1919년 3.1운동에는 병천을 비롯한 각지역에서
성공회의 지도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940년에는 일제에 의하여 모든 선교사들이 강제 출국을 당하는 비극과 함께 성미가엘신학원이 강제 폐교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1945년 해방이후에도 이러한 어려움은 계속되었고 6.25동란을 겪으면서 6명의 성직자와 수 도자가 공산군에 의하여 희생되는 가운데 경제적인 고난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후 1956년에 대한성공회는 새로운 교구장으로 김요한(John Daly)주교를 맞이하면서 새로 운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로 영등포와 강원도 황지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봉사, 상담, 복지, 교육사업 등의 선교활동을 펴서 산업선교의 효시를 이루었습니다.
둘째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가입하여 일찍이 벌려왔던 교회일치운동에 기구적인 참여를 하게 되 었으며,
셋째로 전후의 어려운 사회상황에서 기아해방운동을 벌려 자활마을의 개척과 음성 나환자의 정착촌을 세우는 등 사회복지활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벌렸습니다.
이러한 대한성공회는 1965년에 새로운 역사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서울과 대전으로 교구를 분할하고 최초의 대한인 서울교구장으로 이천환주교를 선출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한국인의 지도력 아래 한국의 교회로 새롭게 재편되는 계기를 맞이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974년에는 부산교구를 신설하여 세계성공회
안에서 하나의 독립된 교회로 공인되는 발판을 만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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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의 대한성공회는 반유신을 비롯한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선교와 함께 장애인을 위한 성베드로학교를 개설하는 등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려 나갔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에 인권회복을 위한 집회와 다양한 민주화 프로그램의 중심이 되어 온바 있는 서울대성당은 특히 우리나라 민주화의 분수령을 이루었던 1987년의 6.10민주화항쟁의
시발지가 되어 전국으 로 확대되어 갔으며 에큐메니칼 운동의 거룩한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또한 1980년대에 주 목할 만한 일로서 성공회가 벌려온 바 있는 "나눔 운동"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빈민선교나 도시선교와는 달리 스스로 마을 공동체를 조직하고 자활사업체를 조합형식으 로 만들어가며 교회를 통하여 서로 가진것을 나누면서 미래를 열어가는 선교활동입니다. 성공회는 현재 전국에 7개의 "나눔의
집"을 운영하면서 선교와 생활공동체를 이루어 가고 있 습니다.
오늘날 대한성공회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원교회로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주도적인 역할 을 감당해 왔습니다. 우리는 다만 기구적인 일치를 도모하려는 것보다는 선교적 협력과 일 치를 이루어 가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한국천주교나 한국정교회와도 별도의 대화와 협력관계를 지속해 왔습니다.
이와 함께 학생선교를 위하여 한국 기독학생총 연맹에 참여하고 있으며 청년선교를 위하여 YMCA와 YWCA에 참여하고 있으며 교육활 동을 위하여는 연세대학교 이사회를 구성하는 일원이며, 성공회대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외에 선교연합기구인 기독교방송, 대한성서공회, 대한기독교서회 등에 이사를 파송하여 방송선교와 성서의 반포 그리고 문서연합선교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런 점에서 볼때 대한성공회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발하게 에쿠메니칼운동을 이끌어 가고 있는 교회의 하나로서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열린 교회"이며 정직하고
정의로운 미래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하여 함께 노력하는 교회입니다.
대한성공회는 아직도 수적으로 참 미약합니다. 6.25전쟁 이전까지 북한에 있던 많은 교회를 잃은데다가 일찍이 너무나 엄격한 성직자양성 프로그램으로 인하여 충분한 성직자를 길러내 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세계 162개국에 퍼져 있는 약 1억의 성공회 신자들 과 교류하면서 이 땅에 참사랑과 진리가 이루어지는 세계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는 열 사람의 의인을 만들어 내고 마침내 교회가 하나가 될 날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현재 대한성공회는 전국에 100여교회, 약 5만명의 신자가 있으며, 3개 교구는 각교구를 중심 으로 교회발전과 사회복음화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1990년 9월 29일, 대한성공회는 선교 100주년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 겨레의 생명"이라는 주제 아래 겨레에게 생명을 전하고 민족의 평화 통일을 위하여 일하는
교회가 될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1992년 9월 29일 관구헌장 선포식을 갖고 1993년 4월 16일 초대관구장 취임식과 함께 독립 관구로 승격하면서 겨레에서 생명을 주고, 민족과 함께 하는 새 시대의 교회로 거듭나게 된 대한성공회는 2천년대의 마지막 10년을 '복음화 10년'(Decade of Evangelism)기간으로 정하 고 새 시대를 주님께 봉헌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기 위하여 힘차게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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