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31 다해 연중18주일 호세 11:1-11 / 골로 3:1-11 / 루가 12:13-21 성사(聖事)와 인생(人生) 성사(聖事)라는 용어는 그리스도교의 전문용어 중 하나입니다. 신자가 되기 위해선 세례성사, 주님의 살과 피를 영하기 위해선 성체성사를 받아야 합니다. 그밖에도 신앙의 어른이 되는 견진성사, 죄의 고백과 용서를 받는 고해성사, 결혼을 축복하는 혼배성사, 병의 치유를 기원하거나 임종을 준비하는 조병성사, 교회의 성직자로 축성 받는 서품성사 등이 교회가 거행하는 거룩한 예식, 성사입니다. 교회역사를 통해 볼 때, 이 말이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동방교회에서 서방교회로 번역하는 과정 상 약간의 의미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리스어를 주로 사용하는 동방교회에선 뮈스트리온(μυστριον)이라고 하는데, ‘신비(Mystery)’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신앙의 눈으로 볼 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삶의 전 과정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섭리 안에 들어있는 하나의 신비인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잘 표현해 주는 것이 동방교회의 성미술인 이콘(εἰκών, icon)입니다. 우리가 이콘에 있는 하느님과 천사와 성인들을 보는 것은 마치 창 밖에 유한한 세계에 있는 우리가 창 너머 초월적 세계에 존재하는 분들을 보는 일종의 창(窓)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이콘을 보거나 이콘을 통해 기도함으로써 우리 인간은 초월자와 상통하고 궁극적으로 우리 삶이 하느님의 거룩한 신비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동방교회의 용어와 사상이 서방교회의 공식 언어인 라틴어 Sacramentum로 번역됩니다. 이 말은 본래 로마군인들이 제국의 황제에게 복종을 상징하는 서약할 때 쓰던 말을 교회가 차용한 것입니다. 서방교회는 사크라멘툼을 교인들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순명을 맹세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천주교, 성공회, 루터교 등에서는 이러한 서방교회의 교회법적 성사(Sacrament)개념을 사용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용어가 한자문화권으로 오면서 거룩한 일이라는 뜻인 성사(聖事)로 번역된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와 와서는 지구촌 시대에 걸맞게 교단 간에 상호교류와 상호연구를 통해서 성사에 대한 신학이해가 점점 깊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성사를 단지 교회에서 법적으로 규정하는 2가지 혹은 7가지 성사로만 국한하기 보다는 하느님과 인간 나아가 온 세상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영성적이고 신비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인생은 신앙의 눈으로 보면, 성사인 것입니다. 즉, 우리는 생로병사, 희노애락 및 다양한 관계와 사건들을 통해 하느님을 찾고, 만납니다. 또한 하느님 측에서 볼 때, 하느님은 우리 인생을 통해 보이지 않으시는 당신의 은총을 우리에게 베푸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사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해석하고, 하느님을 느끼며 하느님은 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을 주십니다. 이러한 성사를 통해서 우리는 점차 ‘하느님의 성사’로 변화해 갑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하느님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상반된 사람을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 들었습니다. 한 사람은 호세아 예언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부자입니다. 먼저, 호세아 예언자입니다. 호세아는 기원전 8세기 북쪽에 있는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기 직전에 활동한 분입니다. 구약성서에 있는 12명의 예언서 저자 중 호세아 예언자만큼 가정생활이 드러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의 가정생활은 참 불행했습니다. 지난주일 제1독서에서 들은 바대로, 그의 배우자 고멜은 외도를 하였고, 그들의 자녀들 역시 커서 어머니처럼 바람을 피웠습니다. 이처럼 호세아는 배우자와 자식들로 인해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습니다. 하느님의 신탁을 수행하는 예언자 호세아는 자신의 불행한 가정사와 당시 망해가는 나라의 혼란이라는 두 가지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전하는 동시에 그것을 단지 말로만이 아닌 자신의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우선, 그는 결혼약속을 깨뜨린 배우자에 대한 깊은 배신감과 대를 이어 불륜을 저지르는 자식들의 악행에 심한 분노를 느꼈습니다. 이를 통하여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구해내시고 그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야훼 하느님을 배신한 이스라엘 민족의 배은망덕으로 분노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더 강렬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람난 배우자와 불충한 자녀들을 사랑하는 아내로서, 그리고 소중한 자녀로서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의 변치 않으시는 사랑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 호세아서 11장은 이처럼 상반된 하느님의 두 가지 속성, 분노의 심판을 하시는 정의의 하느님과 구원하시려는 사랑의 하느님을 동시에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성서학자들은 이러한 하느님의 속성을 변덕스런 하느님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제가 보기엔 이것은 인간의 머리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고, 오히려 호세아 예언자처럼 몸과 마음의 체험을 통해서 터득할 수 있는 하느님 신비, 하느님의 성사가 아닐까 합니다. 이 상반된 속성이 동시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열쇠는 무엇인가요? 오늘 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야훼 하느님의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사람이 아니고 신이다. 나는 거룩한 신으로 너희 가운데 와 있지만, 너희를 멸하러 온 것이 아니다.(호세 11: 9)” 그렇습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거룩한 자! 이 ‘거룩함’이 바로 하느님의 진정한 속성입니다. 하느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와 구별되십니다. 동시에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원성사(原聖事)’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반대되는 인물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어리석고 탐욕스런 부자가 있습니다. 그는 밭에서 많은 소출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많은 소출을 저장할 창고를 크게 짓고 그 곳에 저장한 다음, 걱정근심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영혼을 위로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가 일군 재산을 통해 마침내 그의 생명은 보장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생에 있어서 가장 절정을 이룬 그 날 밤 그의 영혼은 그의 몸을 떠나게 되었고, 그가 쌓아놓은 재산은 그와 이별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어떤 탐욕에도 빠져 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 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루가 12:15)” 만일 그 부자가 부를 쌓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또 부를 축적한 다음에 자기 영혼이 아니라 하느님과 대화하였다면 어떠했을까요? 그는 아마도 그 부가 어디서부터 유래했는지 깨닫게 되었을 것이고, 자신이 쌓은 재산보다 더 풍요로우신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진정한 풍요로움과 만족을 추구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영혼이 그의 몸을 떠남은 자기의 재산과 이별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부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거쳐야 할 하나의 통과의례일 것입니다. 부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알게 된 그 부자는 자신이 일군 부는 그러한 하느님의 신비를 보여주는 하나의 성사(聖事)이기에 그는 자신만의 것이라는 탐욕스러움에서 자유로워져서 그 부를 나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마치 하느님이 당신의 은총을 인간에게 나누어 주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자선(Charity)의 본질입니다. 그리스도교 자선은 이처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이 성사를 통해 눈에 보이는 행위로 드러나듯이, 하느님의 풍요로움이 자선이라는 행위를 통해 물질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이 부가 얼마나 나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 느끼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탐욕을 조심하라고 하신 것은 그것이 나와 하느님을 못 이어주게 하고, 결국 나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여주신 성사의 근원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 여러분은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 버렸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었기 때문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골로 3:3, 9-10)” 이제 원성사이시고 원신비이신 예수님의 사람들이 된 우리는 예수님처럼 세상의 성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통해 하느님의 신비가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고립된 어리석은 부자가 아니라 예수님과 연결되어 풍요로운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내는 지혜로운 부자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를 하느님의 신비로 초대하시는 참다운 성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