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12 가해 연중6주일 신명 30:15-20 / 1고린 3:1-9 / 마태 5:21-37 그리스도인의 법 서양의 격언 중에 “사회가 있는 곳에 법이 있다(Ubi societas ibi jus)”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가 지속되기 위해선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의 행위를 규정하는 규범(規範)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규범을 규정하는 것을 법(法)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현대사회의 법은 서양법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서양의 법은 로마제국의 법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래서 루돌프 예링(Rudolf von Jhering, 1818-1892)이란 독일의 법학자는 “로마는 세 번 세계를 정복했다. 무력에 의해, 종교에 의해, 그리고 법에 의해.”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무력이란 로마제국의 군사력이고, 종교란 그리스도교이며, 법이란 로마법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그리스도교의 교회법은 구약과 신약이라는 계약법과 유스티니아누스 법전(Codex Justinianus)이라는 로마법이 오랜 세월에 걸쳐 서로 융합되어 만들어 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히브리문명, 그것도 히브리법이 탄생하는 초기장면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이집트 노예에서 구출해 주신 야훼 하느님과 히브리인들이 맺은 십계명이라는 ‘계약’입니다. 그런데 이 계약은 우리 인간들끼리 하는 계약과는 다릅니다. 먼저, 계약의 당사자가 동등하지 않습니다. 한쪽은 한번 약속한 것을 어기지 않는 능력을 지닌 무한한 신이고, 다른 한쪽은 갈대처럼 오락가락하는 유한한 인간입니다. 이런 면에서 이 계약은 동등하지 않은 두 당사자 간의 계약입니다. 그러나 이 계약의 조건은 유한한 인간에게 유익한 점이 많은 계약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히브리백성이 이 계약을 준수한다면, 야훼께서 그들의 선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 자리 잡고 오래 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야훼 하느님이 약속하신 행복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입니다. 이것은 창세기에 야훼 하느님께서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 “이 동산에 있는 나무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세 2:15-16)”라고 하신 말씀과 비슷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신명 30:15)”은 추상적이지 않고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유대인들은 중국인들 못지않게 세계에서 알아주는 상인(商人)의 DNA가 강한 민족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구약의 계약정신은 신약의 그리스도교에게로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그리고 전 유럽에 그리스도교가 전해지면서 서양 법정신의 근간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서양은 계약을 중요시여기는 법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들은 계약의 당사자들이 서로 굳건한 신뢰를 지켜야 하며, 만일 계약을 어겼을 경우 상응하는 벌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는 공감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서양정신문화의 핵심인 그리스도교 교회법은 이것을 하느님의 법, 즉 신법(神法)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법의 근거는 신법이며, 동시에 불완전한 교회법이 닮기 위해 쇄신하는 목표도 신법인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란 존재가 태어남과 죽음, 달리 표현하면 창조와 종말 사이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순수함이란 초심을 잃지 않음과 동시에 완덕(完德)이라는 열매를 맺어야 하는 이중과제와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러한 초심과 완숙함이란 과정 속에 있는 신앙인들에게 각 단계에 맞는 적절한 훈련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막 생겨난 신생교회인 고린토교회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교의 법이라는 단단한 음식을 바로 먹이지 않고,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리듯 그 진리를 풀어서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방법은 오늘날 바람직한 사목자상이 어떠해야 하는지 좋은 귀감이 됩니다. 사실, 교회마다 상황이 다 다르고, 교회 안에서 신자들의 사정이 다 다르기 때문에 성경과 교리를 해석하고 가르칠 때뿐만 아니라 교회의 제도와 법, 전례와 다양한 관습 등을 설명하는데 여러 가지 모습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겉으로 보이는 다름을 가지고 “‘나는 바울로파다’라느니 ‘나는 아폴로파다’라느니(1고린 3:4)”하는 분열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초대교회때부터 지금까지 교회사목의 어려움은 이러한 다양한 방법이 몰이해와 파벌, 심지어 분열까지 가는 유혹에 늘 노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중에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하나로 획일화 시키려는 독재적 사목을 하던가, 아니면 조화가 깨져서 패거리로 분열되는 파편화된 사목으로 가던가 하는 극단적 양상이 벌어지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바울이 헌신했던 고린토교회에서도 이러한 분열현상이 일어나자,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아폴로는 무엇이고 바울로는 무엇입니까? 아폴로나 나나 다 같이 여러분을 믿음으로 인도한 일꾼에 불과하며 …… 그것을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1고린 3:5-6)” 이 말씀은 사목자와 신자 모두에게 중요한 점을 시사합니다. 먼저, 사목자는 계약의 당사자가 사목자와 신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계약의 당사자는 주님과 주님의 백성인 우리들입니다. 사목자는 다만 이 계약이 잘 지속되고 이 계약을 통해서 신자들이 참된 행복과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잘 안내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만일 그러지 못하면, 파벌현상에 사목자도 부화뇌동되어 서품 때 주님과 계약한 것을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신자들은 눈에 보이는 사목자와 그러한 방법들을 절대화해서 않됩니다. 우리 신앙인은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찬양할 대상은 주님이지, 신부님이나 목사님이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도바울이 권면했던 것보다 더 근원적이 차원에서 법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십계명의 법조항 그리고 후대에 첨가된 각종 율법에 대하여 근원적인 차원에서 재조명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법정신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닙니다. 첫째, 십계명을 비롯한 각종 율법에 대하여 예수님은 각각의 법조문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응용할지를 가르친 율법학자들과 달리 각 계명이 생겨나게 된 근원을 원천적으로 제어하시는 방식을 취하십니다. 예컨대 살인금지계명은 살인에 이르게 하도록 하는 분노를 제어하고, 간음금지계명은 음욕을 품지 않는 방향으로 선회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둘째, ‘~하지 마라’라는 부정적이고 소극적 법과 계명을 뛰어넘어 ‘~을 하라’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윤리를 제시하십니다. 예컨대, “원수를 사랑하여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라는 말씀은 구약과 유대민족의 법정신보다 한 차원 더 진일보한 신법의 진수를 제시하십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법대로 합시다!”라는 말들을 왕왕 듣습니다. 서로 의견이 대립되고, 이해가 충돌할 때 그 해결책으로 법의 권위에 기댑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그 공정함과 정의로움이 잘 지켜지지 못할 때 분노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법이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당위(當爲)라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법, 신법을 근거이자 목적으로 삼고 있는 교회법이 제 기능을 못할 때, 신앙에 심각한 위기가 오기도 합니다. 앞서서 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정의(定義)를 들으며 우리는 이러한 근원적인 말씀이 오히려 구약의 십계명보다 더 엄격해서 심적인 부담감이 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럴 때 마태복음 5장 37절의 말씀, “너희는 그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장황하게 변명을 늘어놓지 말고 자신의 입장을 짧은 말로 분명하게 밝히라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님 법의 핵심은 “서로 사랑하라”라는 것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늘 명심하고 살면서 판단과 실천을 할 때, 어떻게 적용할지는 성령께 지혜와 용기를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나에게 그 법을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알려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법의 핵심이자 우리 그리스도인의 법입니다. 그것은 계약의 당사자이신 하느님이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시기에,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느님께 마음을 연다면, 그리스도의 법은 우리는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행복과 구원을 주시는 법을 주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