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19 가해 연중7주일 레위 19:1-2, 9-18 / 1고린 3:10-11, 16-23 / 마태 5:38-48 완전한 의로움, 완전한 사랑 성경을 번역하거나 해석할 때,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시대상황과 당시의 문화를 감안해서 받아들이는 방법입니다. 오늘날 성경연구는 주로 후자의 방법이 주류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학문적으로만 분석해서 이해하려고 하면, 신앙이 주는 신비를 제대로 느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신학생들이나 신학교 교수들이 지적으로는 잘 설명하지만, 그들에게서 영적으로는 뭔가 부족함을 종종 느끼곤 합니다. 그렇다고 몇 천 년이라는 시간과 멀리 떨어진 공간을 무시하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것도 맹신의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공회를 비롯해서 이른바 오래된 교회전통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교 교단들은 학문적 분석 못지않게 기도와 묵상이라는 영성적 이해를 통해 성경말씀의 깊은 뜻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말씀 중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어라.(마태 5:40-41)”와 같은 말씀은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매우 당혹스런 말씀이라서 예수님의 진정한 뜻이 뭔지, 그리고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가야하는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산상설교의 말씀 중 일부분인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는 두 가지 배경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대인들의 법 관념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 시대 정치와 사회적 상황입니다. 먼저, 고대인들의 주요 법 관념인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학창시절 우리는 세계사 시간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성문법인 <함무라비 법전>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기원전 18세기 중동지역 유목민들이 세운 바빌로니아 왕국의 법전으로서, 여기에‘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유명한 형벌규정이 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중동지역에 있는 여러 민족과 왕국의 법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구약성경에도 이 구절이 있습니다.(출애 21:24-25 참조) 원래 동태복수법은 피해를 입었을 때, 그 이상으로 되갚으려는 폭력의 상승작용을 억제하려는 의도로 제정되었습니다. 이 법이 예수님 시대에도 있는 그대로 적용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아마도 금전으로 보상하는 방식이 널리 통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행은 오늘날에도 금전으로 피해를 보상하는 형태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 시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태오 복음저자가 속한 교회공동체를 둘러싸고 있는 당시 시대상황을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는 물론이고, 초대교회 시기는 로마제국의 서슬 퍼런 식민지 통치시대였습니다. 물론, 로마법이라는 것이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적용되었고 로마제국은 식민지 사람들, 노예들, 로마에 반역을 한 사람들을 가혹하게 대했습니다. 그래서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마태 5:40)”의 말씀은 재판에 회부되고 로마군에 끌려 다니는 가엾은 이들의 체험이 반영된 것입니다. 예컨대, 오른손잡이가 대다수인 사회에서 상대방의 오른뺨을 치려면 오른손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것은 당하는 사람이 참기 어려울 정도로 모욕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상과 같이 보복에 보복이 만연하고,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고 철저히 인권이 유린된 비참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눈에는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욱하는 감정을 절제하는 냉철한 대처를 주문하십니다. 상대방이 오른뺨을 돌려대면, “그래, 내 왼뺨마저 때려봐라!”라는 냉철함과 배짱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왼뺨마저 돌려대라”는 말씀의 진정한 뜻은 굴종적이거나 무기력한 무저항주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당하는 사람이 상대방의 폭력에 휘말려 들어 또 다른 폭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내 안의 분노를 이겨내려는 노력이자, 힘없는 이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당당함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잡히셔서 대사제 앞에서 심문받으실 때, 경비병이 예수님의 뺨을 때리자 “내가 한 말에 잘못이 있다면 어디 대 보아라. 그러나 잘못이 없다면 어찌하여 나를 때리느냐?(요한 18:23)”라고 항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폭력을 당했을 때, 그 폭력에 내 감정이 압도되어 내가 폭력적으로 되지 말고, 냉철하면서 당당하게 그 폭력을 이겨내어 악순환의 굴레에서 해방될 것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단지 미움과 폭력의 순환 고리를 끊는 것에 멈추지 않고 이제 적극적인 행동으로 넓히십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이웃과 원수, 내 민족과 타 민족을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해 온 그동안의 관행을 완전히 뒤집어,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똑같이 사랑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윤리규정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규정의 결론으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레위 19:18)”라고 하십니다. 예수님도 이 말씀을 이어받아 당신의 황금률로 삼으십니다.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사람들과 예수님 그리고 신약의 그리스도교회가 말하는 이웃의 범위는 다릅니다. 이스라엘과 유대교에서 이웃은 민족이란 테두리 안에 있지만, 예수님과 교회에서 말하는 이웃이란 혈연과 민족의 범위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이웃사랑은 단순히 ‘사랑(愛)’이라는 말보다는 넓은 사랑이라는 ‘박애(博愛)’라는 말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 사실, 구약은 하느님을 자비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6절에 “나는 야훼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완전하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성자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라고 말씀하시며 ‘완전함’이란 하느님의 속성을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느님을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목표를 완전함에 두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이번 주 수요일부터 교회는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주님의 수난을 기념하는 사순절을 시작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매주 금요일은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의미로 금육을 하고,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는 한 끼 단식을 해서, 그 비용을 모아 가난한 이웃을 돕는 자선활동을 장려했습니다. 그리고 자선을 할 때, 내 주변에 있는 친지와 이웃을 챙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특별히 사순시기에는 내가 모르지만, 지구촌 어딘가에서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을 향한 넓은 사랑, 즉 박애의 정신에서 우러나오는 자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으로 2000년을 관통해서 그리고 이스라엘을 뛰어넘어 머나먼 이 땅 한반도에 살고 있는 나에게도 그 은혜의 선물을 받았듯이, 우리의 기도와 박애와 자선도 그렇게 시공간을 넘어서 펼쳐지길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신으로 대한성공회는 오랜 전부터 해마다 사순절이 되면 극기헌금통을 나눠드리고 사순기간동안 우리가 금식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정성을 담은 헌금을 모아 다른 지역의 어려운 형제자매들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올해 대한성공회는 미얀마 빈곤지역에 있는 아동들을 위한 공부방 건립을 위해 사용하려고 합니다. 현재 군사독재로 고통 받고 있는 미얀마는 대한성공회 성가수녀원에서 훈련받으신 미얀마 수녀님들이 선교하고 계신 곳입니다. 또한 최근에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강진으로 수많은 사상자와 이재민이 발생해서 성공회를 비롯하여 모든 기독교 교단들이 특별헌금으로 돕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우리는 안타까운 소식을 비록 뉴스와 신문으로 접하고 있어서 그 참상을 간접적으로 느끼고 있지만, 다가오는 사순시기에 기도를 통해서 영적으로 그들의 울부짖음에 연대해서 함께 해주시길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의로움과 사랑의 법을 주셨습니다. 이 의로움과 사랑이 나와 이웃을 살리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이끌 것을 믿고 소망합니다. 우리를 완전케 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