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05 가해 사순2주일 창세 12:1-4 / 로마 4:1-5, 13-17 / 마태 17:1-9 신앙체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 여러분은 살면서 잊지 못할 체험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만약 그런 체험이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현재 여러분의 기억 속에 소중히 남아서 삶을 사는데 어떤 영향을 주고 있을 겁니다. 그 중에서도 긍정적인 체험이거나 뭔가 인생에 큰 깨달음을 준 체험일 경우, 그것은 아마도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오직 자신만의 정신적 자산이 됩니다. 특별히, 신앙체험은 개인의 인생관 더 나아가 이승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저승에서의 삶까지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어떤 면에서는 궁극적인 체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들은 독서와 복음에서 우리는 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구약에선 아브라함이고, 신약에선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의 체험이야기입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신앙체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네 가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창세12:1)”입니다. 이 구절은 성경 맨 처음에 나오는 창세기 첫 장에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빛이 생겨라!’(창세1:3)”고 하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주도로 모든 만물이 만들어졌듯이, 신앙체험도 내가 먼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먼저 나에게 오시고 말을 거셔야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소명(Mission)입니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라고 명하십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신앙생활을 통해 그가 지금껏 편하게 여기고 있는 삶의 자리가 크게 변화됨을 예고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체험은 우리를 현 상태 그대로 머물게 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진리자체라는 측면에선 볼 땐 불변(unchange)하시는 분이지만, 세상을 창조하시고 완성시킨다는 측면에서 볼 땐, 항상 변화(change)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체험에서 받은 소명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인생의 참된 목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는 ‘축복’입니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큰 민족을 일으켜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이 바로 복을 끼쳐주는 이름이 되게 해 주실 것이고, 더 나아가 세상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덕을 입을 것이라고 축복의 약속을 해 주십니다. 그것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축복의 약속은 마침내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모두 아브라함을 ‘우리 신앙의 아버지’로 부르는 것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체험은 현재와 미래까지 연결되는 궁극적 차원을 지닙니다. 네 번째는 ‘순명’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브람은 야훼께서 분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 아브람의 나이는 칠십 오세였다(창세12:4)”라는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체험을 한 뒤, 그는 한 평생 일궈 온 것들을 다 챙겨서 어디로 갈지도 모르면서 오직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75세가 된 노인인 아브라함에게 또 다른 인생2막이 시작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체험한 세 명의 제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선 여러 제자 중에서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산으로 가십니다. 이 분들은 성 목요일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잡히시기 전에 깊은 번민의 기도를 하실 때도 곁에 있었던 분들이었습니다.(마태 26:37 참조) 그런데 예수께선 왜 그들만 따로 데리고 가셨을까요? 어쩌면 앞으로 닥쳐올 엄청난 고난의 시기를 대비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의 영광스런 모습을 짧게나마 미리 맛보게 하심으로써, 그 시련을 이겨낼 영적 힘을 주시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예수님께서 평소에 훌륭한 가르침을 주시고, 병자를 치유하시고, 여러 가지 기적을 하셨다 하더라도, 만일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라는 신앙체험이 없었다면, 장차 대사제들이 보낸 경비병들에게 잡히고 마침내 총독 앞에 끌려가 십자가형을 받고 처형되실 때, 그들은 존경하고 따랐던 위대한 스승이자 좋은 분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과 슬픔으로만 그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불의하고 거대한 권력 앞에서 의인의 외침은 얼마나 무기력한지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는 것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는 주님의 수난을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실로 커다란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 모습인 천상의 존재로 변모하신 것을 본 세 명의 제자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베드로는 이 모습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고 하면서 신비한 이 체험 속에 계속해서 머물고 싶어 합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심정은 아마도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이 잠시 사후세계에서 밝은 빛과 그 빛의 안내로 아름다운 세계로 들어갔을 때, 더 이상 이승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고 증언한 것과 비슷한 감정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제자들이 산에서 겪었던 체험은 보통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선하게 살다가 죽었을 때 사후세계에서 맛보는 세상을 앞당겨 체험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이곳에 계속 머물고 싶은 심정을 갖고 있을 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태 17:5)”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 받은 하느님의 음성을 연상시켜 줍니다. 그러나 세례 때와 영광스런 변모 때가 다른 점은 세례 때는 성부와 성자 사이에 '사명(Mission)'이 선언되었지만, 영광스런 변모에서는 이 사명에 이제 제자들도 따르도록 명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명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 사명에 헌신할 때, 그들도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할 거라는 축복도 담겨진 것입니다. 제자들이 보고 들은 이 놀라운 광경 앞에 얼굴을 땅에 묻고 엎드려 경외감을 느끼고 있을 때, 다시 이 세상의 모습으로 돌아오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 체험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체험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는 신비이며, 설사 이 신비를 말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이상한 취급을 받거나 그 신비의 거룩함이 싸구려 저급한 체험으로 매도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신비는 이 세상을 살면서 실천으로 증명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써 이루신 것처럼 말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사순 두 번째 주일에 교회는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사건을 통하여 신앙체험의 초월성과 그 신비로 초대합니다. 여러분들 중 어떤 분들은 어렸을 때부터 또 어떤 분들은 어른이 되어서 신앙생활을 하시고 계십니다. 교회는 전례력에 따라 말씀과 성사로 하느님의 계시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 간의 사귐을 통해서, 또는 사제의 가르침과 여러 신앙인들의 간증 등을 통해서 신앙생활에 유익함을 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을 통하여 우리는 자연스럽게 교회의 문화와 교리지식을 알게 되고 교회 공동체의 한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이 갖고 있는 초월성과 그 신비는 결국 나라는 한 개인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만날 때,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오늘 아브라함이 야훼 하느님을 체험하고 늙은 나이에 인생의 또 다른 길을 걸었고, 3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천상모습을 보고 이 세상에서 벌어질 악질적인 십자가 사건을 이겨냈듯이 말입니다. 오늘날 사회는 참으로 풍요롭고 재미있는 것들로 가득 찬 물질세계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이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개인이 누리는 이 물질세계는 아무리 늘려도 100년 전후라는 시간의 한계 안에서 끝납니다. 우리는 원하건 원치 않던 간에 이 물질세계에서 지내는 시간이 지나면 다른 차원의 세계로 건너가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신앙체험은 보이는 세계에 살고 있는 내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미리 보는 것입니다. 이 신앙체험을 통해 우리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게 되고, 느끼지 못했던 것이 느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교에선 이 신앙체험을 ‘종말론적 체험’이라고 합니다. 마치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깨닫듯이 진정한 신앙체험은 우리를 이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신앙, 우리의 인생은 한 차원 더 깊고, 더 높고, 더 넓은 차원으로 변화됩니다. 오늘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축일을 맞아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십자가 속에 숨겨진 그 영광을 볼 수 있는 은총을 얻기를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