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18 가해 연중11주일
창세 18:1-15/로마 5:1-8/마태
9:35-10:8
상수리
나무에서
비 오늘 날 운전하면서 가고 있었습니다.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정류장에 세 명이
서 있는 걸 봤습니다. 한 사람은 노인인데 곧 죽을 듯 위독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의사인데 내 병을 고쳐 준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은 여인인데, 인생의 반려자로 함께 살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비도 오고 있어서 이들을 차에 태우고 싶었지만, 짐이 가득 차 있어
운전석 외에 한 사람만 태울 공간밖에 없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운전자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것은 어느 회사 면접 때 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서 어떤 사람이 아주 지혜롭게 대답해서 합격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자동차 열쇠를 의사한테 줘서 병든 노인을 태워 병원에 가도록 하고, 자기는 비가 그칠 때까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정류장에 남아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질문을 받았을 때, 대부분
사람들은 상당히 어려워하면서 세 사람 중 한 사람을 택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동차는 내 거고 그래서 내가 운전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문제해결을 위한 창의적 발상을 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난관에 봉착할 때가 있는데, 어떤 때는 불가능하다고 포기할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불굴의 힘으로 다시 일어서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제1독서와
제2독서는 우리에게 생각할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1독서를 보면, 아브라함이
상수리나무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는데, 세 명의 나그네를 보고 그들을 자기 집에 초대합니다. 손님들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정성스러운 대접에 흡족해하며, 내년 봄에
다시 찾아올 건데, 그 때 사라는 아기를 낳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손을
학수고대했던 노부부는 아무리 축복의 예언이라고 해도 실현 불가능하다고 여겨 피식 웃어 넘깁니다. 그러자, 손님들은 정색을 하며 신성(神性)을
드러내며 하느님의 선물을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처럼 평범한 일상을 뛰어넘는 그래서 불가능하다고
여긴 일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은 것과는 달리, 사도 바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극적으로
회개한 후, 오랜 세월 복음을 전하며 갖은 시련을 당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간증하십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느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 5:3-5)”
로마서에 있는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회심하자마자 바로 나온 말씀이
아닙니다. 무려 20여 년 동안 온갖 시련을 겪은 사목자로서
간증하였기에 우리에게 힘찬 울림으로 마음에 와닿고 깊이 숙고하게 해 줍니다. 사실 어느 누구도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이런 자세를 가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몇 번 실패하면 힘을 잃고 맙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 역시 천성적으로 이런 불굴의 힘을 가졌던 것은 아닐 겁니다.
오직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
불굴의 힘!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고린도 전서 13장 사랑의 송가에서 사도 바울은 “사랑은 …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라고 말씀했던 겁니다.
오늘 복음은 그 사랑의 힘이 이 세상을 어떻게 보시고,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사람들을 불러서 어떠한 사명을 맡기시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자를 고쳐 주시면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드셨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맞닥뜨린 현실에 대한 예수님의 감정입니다. 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기도하길 요청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마태 9:37)”
그런 다음, 예수님은 사도들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반문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예배를 집전하는 사제들도 있었고, 오늘날로 치면 교리와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칠 신학자와 교리교사
같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많았는데, 왜 사람들을 목자 없는 양이라고 하셨을까, 그리고 왜 기존의 종교지도자들과 대립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선발해서 사도로 삼으셨는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使徒)’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apostle)란 ‘파견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사도는 그 능력과 권한이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파견하시는 분, 즉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증언하는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무상으로 피조물들에게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그 사랑의 힘으로 당신의 선물, 당신의
은총을 값없이 주시는 겁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사도들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시대 사제와 신학자들은 자신의 권한을 가지고
사람들을 시달리게 했지만, 너희는 사람들에게 조건을 달아서 부담을 씌우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했듯이, 그들에게 기쁨을 알리고 죄의 멍에에서 풀어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파견하신 이유이며, 교회는
이것을 자신의 존재이유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교회는 예수시대 사제들과 바리사이, 율법학자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집단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신선하고 창의적인 지혜와 사랑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구한말 나라가 혼란하여 사람들이 암울해하던 시기, 기독교는 우리민족에게 새로운 빛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복음의 내용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회풍속에도 변화의 선물을 안겼습니다. 예컨대, 양반들이 언문(諺文)이라고
업신여기던 한글로 성경을 읽고 신문을 발간하였으며, 여성도 배우게 해서 남녀 간의 지식의 차별을 철폐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의 기독교는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주님의 사도들인 성직자들, 그리고 제자들인 신자들은 더 이상 일반인들로부터 본받아야 할 사람들이 아닌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도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고, 성직 지망자들도 크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교회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불가능하다고
여긴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에게 자식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12사도들을 세우시고 능력을 주셨듯이
지금도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은총을 주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는
그 은총을 감지하지 못하거나 사라처럼 불가능한 일이라고 치부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하느님의 은총으로 회개할 때, 우리는 어려운 현실에도 좌절하지 않고 인내심을 갖고 믿음을 키우며 희망을
꿈꿀 수 있습니다. 그 힘은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이 하느님의 선물을 잘 받기 위해선 머리를 숙여 땅만 보지 말고, 머리를
들어 상수리나무 저 멀리 있는 곳을 보길 바랍니다. 그러면 인생의 방향이 보일 겁니다. 그리고 그 방향을 향하여 인내심을 갖고 기도하면서 걸어 가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그 여정 중에 여러분은 자신도 모르는 새 어느덧 사도 바울처럼 주님의 사도로 변해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와 모든 교인 여러분에게 이러한 주님의 사랑과 선물이
가득하시길 우리를 사도로 불러 주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