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백척간두에서(가해 연중12주일)
작성일 : 2023-06-25       클릭 : 177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30625 가해 연중12주일

창세 21:8-21/로마 6:1-11 / 마태 10:24-39

 

백척간두에서

 

백척간두(百尺竿頭)’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척이나 되는 장대의 끝이라는 뜻입니다. 한 척()이 약30센티()라고 치면, 백 척은 대략 30미터(m)가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간두(竿頭)란 빨래 줄을 높이 올리는 긴 막대기 혹은 장대 끝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말을 벼랑 끝에 서 있다는 말과 유사하게 사용합니다. 그것은 해결책이 없는 막다른 상태에 몰린 위기에 처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실 백척간두란 말은 뒤에 진일보(進一步)’라는 말이 더 있습니다. 그래서 백척간두 진일보라고 함께 사용합니다. 그렇게 되면 말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것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한계상황을 극복하고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딛는다는 매우 용감하고 진취적인 의미로 바뀝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만일 그렇게 할 경우, 높은 데서 떨어져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의 진정한 뜻은 깨달음의 세계 내지 난관에 봉착한 현실을 돌파하기 위해선 과감하게 한발을 앞으로 내딛어야만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는 반전(反轉)의 메시지, 역설의 진리를 담고 있는 은유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백척간두와 같은 한계상황에 처했을 때 하느님과 만난 한 여인의 이야기이고, 복음 역시 그러한 상황에 놓였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먼저, 1독서를 살펴보겠습니다. 여기 한 집안의 가장인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본처인 사라와 갓난아기 이사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엔 몸종 출신 하갈과 그녀가 낳은 이스마엘이 있습니다. 순서상으로는 이스마엘이 장남이지만, 이스마엘은 서자(庶子)라서 상속에 불리한 처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는 마음이 놓이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편 아브라함에게 사라와 이스마엘을 집안에서 내쫓아 달라고 요구합니다. 난처한 상황에 처한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은 사라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하느님께 그 해결책을 맡깁니다. 그래서 먹을거리 얼마와 물 한 가죽 부대를 주고 그들 모자(母子)를 내보냅니다. 이것은 당시 대리모에게서 아이를 낳게 할 때 그 여인에게 주어야 할 보상보다도 형편없이 적은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참으로 야박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양식을 받고 내쫓긴 모자는 광야에서 갈증과 두려움에 마침내 통곡합니다. 이 모습은 누구에게나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데 이 백척간두와 같은 막다른 상황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저기서 네 아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다. 어서 가서 아이를 일으켜주어라. 내가 그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창세 21:17-18) 그리고 그녀의 눈을 열어 주시어, 우물을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녀는 백척간두에서 새로운 세계로 진일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래 이스마엘이란 이름은 하느님이 들으신다라는 의미인데, 그 이름 그대로 하느님은 그들이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그 높고 위험한 장대 끝에서 매달린 그들에게 새로운 곳으로 넘어갈 장소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안주인 사라로부터 네 꼬라지를 알아라!”라고 구박받는 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 이스마엘 역시 아브라함의 서자라는 꼬리표로 살아갈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친히 개입하셔서 그녀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낳은 이스마엘도 더는 남편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닌 나 하갈의 아들이다!’라는 새로운 가문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역시 백척간두에 처한 제자들에게 어떻게 진일보할 수 있는지를 가르칩니다. 사실, 마태오 복음의 이 대목은 초대교회 시기 마태오가 속한 교회 공동체가 처한 박해상황이 반영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박해가 예견되는 상황에서 복음선포에 나선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권유를 반복하십니다. (26, 28, 31) 예수께서는 박해가 두려워 비밀리에 입에서 입으로 전하거나,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처럼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지 말고 당당히 진리를 증언하라고 하십니다. 그 용기와 배짱은 하느님만이 우리를 속속들이 아시며 당신의 섭리로 우리를 돌보신다는 깊은 신뢰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말씀이 평소 원수를 사랑하고 평화를 위해 일하라는 예수님의 부드러운 이미지와 상반되어서, 우리는 적잖이 당혹스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다 보면, 건강한 신체를 보존하기 위해 칼을 사용하여 암()을 잘라낼 때가 있듯이, 참 평화와 참된 선을 위해선 때론 어설픈 야합과 선을 긋는 결연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몸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데 하물며 구원과 진리라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선 더욱 그런 마음가짐이 필요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그 모범이 되신 것이며, 교회는 그러한 충실한 제자들의 증언과 삶이 있었기에 지속될 수 있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다시 살아나 그분과 함께 하느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로마 6:4-11 참조)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신앙과 삶의 태도는 백척간두 진일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하느님의 나라와 그 구원을 향해 끊임없이 한계상황을 돌파하고 신세계를 향해 전진해야 합니다. 신앙인과 교회는 그럴 때 하느님의 은총을 더욱 더 느끼고 그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길은 인간본성 상 누구도 선뜻 나서기 힘든 그래서 슬쩍 회피하고 싶은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건너뛰고 바로 부활의 영광과 천국을 향해 승천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공부에 왕도가 없다(There is no royal road to learning)”라는 영어 속담처럼 구원으로 가는 길은 십자가를 빼고 우회하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만약 그런 길이 있다고 말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정통 그리스도교가 아닌 이단(異端)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이 이런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고 해서 두려워서 위축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 두실 정도로 우리의 심령 깊은 곳까지 속속들이 아시는 하느님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잘 아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극진히 귀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다만, 미숙한 아이가 성숙한 어른으로 자라는 것이 자연의 섭리인 것처럼, 주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마냥 미성숙한 상태로 머물지 않고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당신을 닮아 가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그래서 비록 그 깨우침과 성숙의 과정이 어렵고 힘들지만 주님은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은총의 힘을 주시고 동행해 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들은 것처럼 우리가 어떨 때 하도 힘들어서 울부짖을 때, 주님은 그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느님의 도움으로 하갈이 힘을 얻고 꿋꿋이 다시 일어나서 그 길을 갔듯이, 우리 역시 십자가의 길이며 구원의 길을 힘차게 걸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백척간두에 서 있는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진일보할 수 있는 신앙의 비결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함께 하시면서 지혜와 힘을 주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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