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09 가해 연중14주일
창세24:34-38, 42-49, 58-67 / 로마 7:15-25 / 마태 11:16-19, 25-30
그리스도인의 안목(眼目)
안목(眼目)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 말 사전에는 ‘사물의 좋고 나쁨 또는 진위나
가치를 분별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한자어 ‘안목’을 순 우리말로 하면 ‘보는
눈’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말은 물건을 고르거나 물건의
가치를 평가할 때 쓰기도 하고, 어떤 계획이나 정책을 수립할 때 올바른 관점을 가지는 능력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저는 아내와 가끔 장보러 가는데 그럴 때마다 어떤 고기가 신선한지,
어떤 채소와 과일이 맛있는지 보는 눈이 없어서 그저 아내가 고르는 것을 멍하니 보기만 합니다. 한마디로
물건 보는 안목이 없는 거죠. 그렇지만 조직의 정책을 기획하고 방향을 설정하는 등 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분야에서는 제가 비교적 안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처한 환경, 훈련 받은 분야, 관심의 정도에 따라서 안목이 다 다른 것 같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들 이사악의 배필을 구해오라는 아브라함의
명을 받은 아브라함의 집사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안목에 대하여 생각할 계기를 줍니다. 이 이야기 초반에
아브라함은 집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며느릿감은 내가 살고 있는 이 곳 가나안 사람의 딸 가운데서 고르지 않을
것이며, 내 고향 내 친척들한테 가서 내 아들 이사악의 신붓감을 골라 오겠다고 하여라(창세 24:3-4)”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듭니다. 가나안은 외지인 아브라함이
이주해 와서 부를 일구게 해준 곳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유력한
가나안 사람 중에서 신붓감을 택하는 것이 아브라함 가문이 계속해서 이곳에서 부와 권세를 일구는데 더 유리할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저 먼 고향 땅까지 가서 신붓감을 구하려고 했을까요? 성서학자들은
당시에는 혈족관념이 강해서 되도록 같은 혈족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보기엔 단지 외형적인 풍습 외에 더 내밀한 심리가 있다고 봅니다. 창세기
다른 부분을 보면, 가나안은 풍요롭고 비옥한 땅이었지만, 그
풍요로움 때문에 인간의 탐욕이 만연한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예컨대, 아브라함이
자식처럼 여긴 조카 롯은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올 때, 함께 따라올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지만, 양떼가 불어날 정도로 부유해지자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전
재산이 적었을 때는 서로 돕고 마음이 맞았지만, 재산이 많아지자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롯에게 먼저 땅을 선택하라고 하였고, 롯은 더
비옥한 땅 소돔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롯에게 불행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부유한 소돔은 타락할 대로 타락해서 결국 하늘에서 유황불이 내려와 멸망하였고,
롯의 가족은 간신히 몸만 빠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겪은 아브라함은
아마도 가나안 사람들의 도덕의식에 대해 깊은 불신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경제적으로 가나안보다는 못하지만 소박한 고향사람들의 의식이 더 건강할 거라고 여긴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집사에게 명한 원칙이 위와 같다면, 아브라함의
명을 받아서 고향 땅에서 신붓감을 골라야 할 집사는 또 어떤 안목으로 그 많은 젊은 처녀 중에서 누굴 선택해야 할까 고심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 속으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저에게 물을 마시게 해줄 뿐만 아니라, 제 낙타에게도 물을 마시게 해주겠다고 나서는 아가씨가 있으면 그가 바로 하느님의 심복 이사악의 아내 감으로
정해주신 여자라고 알겠습니다. (창세 24: 14)”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인품과 품행이 올바른 사람을
택하겠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의 선택은 탁월했고, 그녀는
아브라함 집안에 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처럼 건강한 인성을 갖는다는 것은 복된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의 가장 근본 토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신을 갈고 닦는 것을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습니다. 우리 성당 세례대에도 그리스도인의 수덕(修德)원리에 대해서 8글자로 표현하고 있는데,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이 바로 수기(修己), 즉 자신을 수련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선 이것을 기도가
포함된 영성훈련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인들이 영성훈련을 하며 자신을 수련할 때 제일 크게
부딪히며 당혹스러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분열되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마음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로마 7:22-24)”
사실, 기도의 효과 가운데 하나는 기도가 우리의 참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데 있습니다. 기도를 하면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주었던 그 위로의
망토가 빛이 바라게 되고 헤지게 되면서 떳떳하지 못한 자신의 참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인지 몰라도, 사람들이 기도가 어렵다, 효과가 없다, 괜한 시간낭비 같다고 말할 때, 어쩌면 기도라는 거룩한 빛에 비친
뼈가 시리도록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회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수치스럽고 아프다고 해도 그러한 것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은총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내면을
이처럼 용기 있게 간증함으로써 그로부터 하느님의 정화(淨化)의 손길이
얼마나 깊고 필요한지 깨달았고, 마침내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수신(修身)은 사도바울이
겪었던 바로 그 과정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되고, 하느님의 안목으로 세상을 살아나갈 능력을
갖게 해 줍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 우리사회는 이른바 ‘반대를 위한 반대!’현상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와 거짓, 옳고 그름에 대한 건전한 토론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현상은 오늘날만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요한이 나타나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말한다(마태 11:18-19)”라고 한탄하신 예수님의 탄식을 들으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신을 수양하지 않은 인간의 삐뚤어진 안목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마음을 비우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마태 11:25)”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잘 알고 똑똑하다고 하면서 남을 판단하고 단죄할 때, 어쩌면 그 안다는 것이 진정 나에게도 적용된 것인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 진리를 듣고 배우려는 철부지 어린이들의 순수한 마음이 우리를 더 성숙하고, 안목 있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 어떤 편견이나 왜곡된 안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순수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지혜와 은총으로 성숙해 질 때, 그들은 엄숙한 세례 요한의 모습에서도, 자유로운 예수님의 행동에서도 하느님의 구원신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지향할 신앙의 궁극적 안목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애쓴다고 쉽게 도달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은총의 도우심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분열된 내 자신의 모습에 놀라고 힘들어 할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오늘 예수께서 하신 말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마태 11:28)”는 말씀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연약하고 상처 난 우리마음을 잘 아시는 분이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르려고 애쓰는 우리의 노력을
가상히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마음의 여유와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기에 위축되거나 회피하지 않고 희망을 갖고 구원을 향해 한 걸음씩 걸을 수
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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