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산 위와 산 아래(주님의 변모축일)
작성일 : 2023-08-06       클릭 : 222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30806 주님의 변모축일

다니 7:9-10, 13-14 / 2베드 1:16-19 / 루가 9:28-36

 

 

산 위와 산 아래

 

여기 한 노인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베드로입니다. 그는 젊었을 때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어 자신의 전 생애를 스승 예수님을 위해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베드로의 둘째 편지에서 그는 인생 말년에 교회신자들에게 젊었을 때 경험한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사건을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최고의 영광을 지닌 하느님께서 그분을 가리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고 말씀하시는 음성이 들려 왔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는 그 거룩한 산에서 그분과 함께 있었으므로 하늘에서 들여오는 그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2베드 1:17-18)”

여러분도 지난 세월을 회상하실 때, 베드로 사도처럼 강렬하게 남아있는 사건, 특별히 그러한 신앙체험이 있나요? 만일, 그러한 체험이 있었다면 그것은 큰 축복이자 은총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거룩한 경험은 내 힘에서 나온 것이 아닌 전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고귀한 선물이라서 내가 살아가는 동안 무수히 많은 역경과 유혹과 흔들림이 올 때, 나와 하느님을 이어주는 생명줄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의 경우, 그러한 체험이 생겼을 당시에는 그 경이로움에 놀랐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의미를 조금씩 깊이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베드로 역시 젊었을 때 예수님의 변모사건을 보고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루가 9:33)”라고 말했던 것은 그 경이로움에 압도된 경탄의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참된 의미를 아직 온전히 깨닫진 못하였습니다. 그 후 그들은 산에서 내려와 스승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의 임재와 선교활동을 하면서 그 거룩한 변모사건의 의미를 점점 깊이 알아갔던 게 아닌가 합니다.

오늘 복음은 사도 베드로의 신앙에 있어서 강렬한 영향을 준 사건 중 하나인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중 베드로, 요한 그리고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습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산 아래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그분의 모습이 변모되었고 모세와 엘리아가 나타나서 예수님의 앞날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눕니다.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그의 죽음에 관하여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좀 더 정확한 번역은 세상을 떠나실 일에 대하여입니다. 신약성경 원본에는 이것을 엑소도스(ἔξοδος)’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말은 사람 혹은 자금 등이 어떤 지역에서 대량으로 빠져나갈 때 사용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 말은 구약성경 출애굽기 책이름이기도 합니다. 즉 출애굽기라 부르는 엑소도스(Exodus)는 히브리백성이 모세의 영도로 이집트를 탈출한 것을 기록한 책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의 히브리백성이 노예생활에서 탈출한 것처럼 신약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 인간을 죄의 노예에서 탈출시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나누신 이야기는 이른바 2의 출애굽사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 황홀경에 빠져 이곳에서 계속해서 머물고 싶어 했지만, 그 거룩한 현현(顯現)은 다시 산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생활로 돌아와서 구현(具顯)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산 아래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요?

오늘 주보에 소개해 드린 라파엘로(Raffaello)의 그림, <예수님의 변모 The Transfiguration>에서 묘사되어 있듯이 산 위에서 나타난 주님의 변모는 산 아래에서 벌어진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를 치유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는 주님의 제자들의 모습과 동시적으로 볼 때만이 비로소 우리의 실존과 신앙 그리고 이에 따르는 우리교회, 우리사회를 좀 더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인 주님의 변모 이야기에 이어서 나오는 내용은 사람들이 악령 들린 아이를 치유해 달라고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는데, 제자들이 그 아이에게서 악령을 쫓아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마도 산 위에서 예수님이 변모하시고 따라갔던 제자들이 그 놀라운 광경에 감동받고 있을 때, 산 아래에 있는 제자들은 무기력하고 난처한 상황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루가복음은 산 위에 영광과 능력, 산 아래의 무능과 비참을 대조시켜 놓음으로써 우리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반된 모습은 예수님의 변모 때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도 겪었던 모습입니다. 모세의 경우, 그가 주님의 도움으로 이집트의 노예로 고통 받던 히브리백성을 이끌고 홍해바다를 건너 시나이산에 도착해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으러 산으로 올라가 있을 동안, 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백성들은 하느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모세는 야훼 하느님을 만난 후, 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서 사람들이 제대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출애 34: 29-30 참조) 이와 같이 하느님의 신성을 체험한 그가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모습으로 변모한 것과는 반대로,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자신들의 신으로 떠받드는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이처럼 시나이 산 위와 산 아래의 모습은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엘리야 예언자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열왕기 상권을 보면, 과부의 아들을 살려내고, 갈멜산에서 거짓예언자들을 몰아 낸 엘리야 예언자가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깊은 신비체험을 하고 있을 때, 그가 살던 당시 이스라엘은 왕과 왕비의 악행으로 온 나라가 도탄에 빠져 있었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신앙인이 바라는 기쁨 중 하나는 오늘 주님의 변모를 보고 감격했던 제자들처럼 우리 신앙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뵙는 것입니다. 특별히 루가복음은 그 변모가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일어났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는 참으로 소중한 요소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모세와 엘리야처럼 주님과 대화할 수 있으며,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처럼 평소와 다른 신비로운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뿐만 아니라 교회역사에서도 보듯이 많은 성인, 성녀 그리고 신실한 신앙인들은 모두 기도를 통해 주님과 만나서 변모된 영적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들은 불완전하고 심지어 부조리한 현실과 직면해야 했습니다. 거룩하게 변모된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서 직면한 현실은 우상숭배에 빠진 백성들의 모습이었고,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난 엘리야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마주한 현실은 영적으로 혼란에 빠진 이스라엘이었으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세 명의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왔을 때, 맞닥뜨린 것은 악령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아이와 이를 치유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무기력한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모습을 봅시다. 강화읍 언덕에 있는 우리교회의 모습은 마치 산 위에 있는 거룩한 처소와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 주일마다 거룩한 예배를 드립니다. 이 예배에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봉독하고, 그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며,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여 주님의 몸과 피로 우리 안에 모십니다. 실로 우리는 예배를 통해 주님의 변모를 재현(再現)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가 끝나고 산에서 내려왔을 때, 우리는 여전히 하나도 변하지 않은 우리의 낡은 생각과 습관, 해묵은 감정 덩어리에서 엑소도스(exodus)'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속으로 다시 되돌아서 살고 있습니다. 또한 악령 들린 아이를 치유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 제자들처럼 우리 교회 역시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늘 산 위에서 주님의 변모를 보고 그 안에 머물기를 소망하지만, 산 아래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무기력해 합니다. 그러나 오늘 소개한 라파엘로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 어떤 한 사람이 귀신들린 아이의 비참함을 보면서도 동시에 손을 들어 산 위에서 변모하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처럼 우리교회, 우리가정, 그리고 우리 각자는 현실의 비참함에 매몰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현실을 회피해서 산 위에만 머물겠다고 고집부리지도 않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한 균형잡힌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은 바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내 자신 혹은 우리 집단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능력의 원천이신 주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에 부딪혀 답을 찾지 못할 때, 매번 되풀이되는 나의 악습과 묵은 감정에 사로잡혀 있을 때, 고개를 들어 주님을 보십시오. 주님만이 무능력과 좌절에 빠진 우리를, 그리고 나를 살립니다. 그럴 때 나는 주님의 제자로 변화되고, 우리교회는 주님의 몸된 교회로 변모되어 갈 것입니다.

주님의 변모축일을 맞이하여 분열되고 좌절과 무기력함에 빠져있는 나와 우리가정, 우리교회 나아가 우리사회를 주님의 능력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영광스럽게 변모되신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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