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곤경에 처했을 때(가해 연중19주일)
작성일 : 2023-08-13       클릭 : 186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30813 가해 연중19주일

창세 37:1-4, 12-28 / 로마 1:5-15 / 마태 14:22-33

 

곤경에 처했을 때

 

 

과학적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고 있는 현대인들은 옛 사람들보다 미신의 영향을 덜 받습니다. 그렇다 해도 바다나 커다란 호수에서 큰 폭풍우를 만나면 우리는 여전히 엄청난 공포심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런지 옛 사람들은 바다나 호수는 악령들의 거처나 혼돈의 세력이 머무는 위험한 곳으로 이해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어촌이나 항구가 있는 곳에는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사당이나 신전이 있어서 출항을 하기 전에 거기서 제사나 굿 등 종교의식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대중신심에서도 이와 유사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라는 상징은 거친 풍랑과도 같은 악한 세상에서 교회와 신도들의 영혼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구원의 방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옥성당도 구약의 노아의 방주처럼 강화읍 언덕에 세워진 방주이자 구원의 담지자와 같은 이미지를 띠고 있습니다. 또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여러 호칭 중 바다의 별(Stella Maris)’라는 칭호가 있는데 이것은 서구 기독교인들, 특히 선원들이 망망대해를 항해하면서 이 호칭을 부르며 기도할 때, 포근한 어머니 품처럼 자신들을 안전하게 지켜달라는 원초적 믿음이 담겨있습니다. 이러한 대중신심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있습니다. 한 예로 강화군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중국 절강성 조우산시(舟山市)에는 근처 닝포시(寧波市)와 함께 과거 한국 및 일본과 무역이 활발한 항구도시였습니다. 특히 조우산시는 심청이가 장님인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인당수에 빠졌다는 심청전의 모티브가 되는 심국공(沈國公)의 후손들이 사는 심가문(沈家門)이란 작은 항구마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푸투오산(普陀山)에 커다란 관음보살(觀音菩薩)이라는 여신상이 해안을 향해 있어서 사람들은 관음보살를 향해 바다에서 안전하게 조업하고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물리적인 위험으로부터, 더 나아가 인생을 살면서 부딪히는 갖가지 곤경과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 달라고 비는 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종교적 본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거센 풍랑을 가라앉힌 기적(마태 8:23-27)과 함께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대표적인 자연기적 이야기입니다. 이 기적 이야기는 마태복음 8장에 있는 풍랑을 가라앉힌 기적과는 달리, 예수님이 인간이 할 수 없는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구약의 출애굽기에 나오는 불붙는 떨기나무에서 하느님이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출애 3:14)”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말씀인 나다(마태 14:27)”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신성을 계시하셨습니다. 또한 베드로가 배에서 나와 당신께 오도록 허락하심으로써 제자들도 당신의 권능에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을 좀 더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주목해 볼 장면은 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과 호수가에서 역풍을 만나 풍랑에 시달리고 있는 제자들 간에 서로 대조되는 장면입니다. 지난주일 주님의 변모축일에 설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산에서 기도 중인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모되시고,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시는 기적이 벌어지며, 이 놀라운 광경에 넋이 나간 세 명의 제자들과 달리, 산 아래에서는 악령들린 아이를 치유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제자들의 모습이 서로 상반된 것과도 같습니다. 특별히 풍랑에 시달리다라는 바사비조(βασανίζω)’라는 그리스어는 원래 고문하다, 못살게 굴다, 괴롭히다라는 뜻으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교회를 배에 비유하는 교회전통에 비추어 볼 때, 아마도 마태오 교회 공동체가 외부적으로는 박해로, 내부적으로는 가라지 같은 엉터리 신자들로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마태오 교회 공동체는 마치 주님이 배 안에 계시지 않은 상태에서 갖가지 난국을 헤쳐 나갈 방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과 달리 예수께서는 밤에 산에서 홀로 기도하시면서 당신에게 닥칠 칠흙같은 어둠, 즉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숙고하고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목해 볼 점은 유령이다!(마태14:26)”라고 소리지르는 제자들과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마태14:27)”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간의 대비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다나 호수는 악령들의 거처나 혼돈의 세력이 있는 곳으로 인식했던 사람들의 관념으로 볼 때, 한 밤중에 호수 위에서 흐릿하게 보이면서 물 위를 걸어오는 사람의 형상을 유령이라며 혼비백산하는 반응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갖가지 기적도 목격했고, 특별히 거센 풍랑을 가라앉힌 예수님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벌벌 떠는 제자들은 모습은 믿음의 길이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나다라고 제자들을 안심시킴과 동시에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여기서 나다라는 그리스말 에고 에이미(ἐγώ εμί)’라는 문장은 앞서 설명했듯이 하느님은 어떠한 수식어로도 묘사할 수 없는, 그래서 그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신의 속성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문장입니다. 왜냐하면, 유령은 실체가 없는 일종의 환상이거나 환각과도 같은 현상이지만, ()은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들의 근거이자 근원이라서 유령과 차원이 다른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믿는 신앙은 실체가 없는 헛깨비와 유령을 믿거나 혹은 유한한 것을 신으로 믿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만물의 참된 근원이자 유한하고 소멸하는 존재가 아닌 영원한 존재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점은 물위에서 벌어진 예수님과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정체를 밝히시자 배 안에 있던 제자들은 안심합니다. 더 나아가 베드로는 예수께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마태 14:28)”라고 청합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얼핏 들으면 광야에서 유혹받을 때, 악마가 예수께 했던 말과 비슷한 구조입니다. 악마는 예수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마태 4:1-11 참조)”이라는 조건을 내걸면서 기적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악마와 베드로의 큰 차이는 악마는 예수님을 유혹에 빠뜨리려는 동기였다면, 베드로의 의향은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예수님을 만나려는 헌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의 허락으로 물 위를 걸었지만, 곧 이어 닦친 거센 바람에 두려움이 몰려와 주님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면서 물에 빠져 허우적거립니다. 그 때, 그는 예수께 살려달라고 외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신성을 목격하고 예수님의 권능에 의지하여 호기롭게 행동에 나섰지만, 주님의 권능을 온전히 수행하기엔 아직 부족함이 많은 상태였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죽음을 당하게 놓아두지 않으시고 그를 구해주십니다. 이를 통해 베드로를 비롯해 배 안의 다른 제자들은 주님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더 깊어졌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살면서 어려가지 곤경과 어려움에 처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처하시나요? 주님처럼 홀로 기도하면서 고난의 시간을 극복하시나요? 아니면 풍랑속에서 있는 배 안의 제자들처럼 어찌할 바를 몰라 갈팡지팡하시나요? 아마도 우리는 많은 경우 제자들처럼 곤경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지만 쉽게 육지에 닿지 못하고 곤경의 풍랑 속에서 표류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다, 내가 여기 있다. 안심하여라!”라고 소리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믿음입니다. 오늘 제2독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도 그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로마 1:6)”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곤경에 처할 때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읍시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행동합시다. 설령 우리의 응답과 행동이 베드로처럼 미숙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건져주셨듯이, 우리를 건져 주실 것을 믿읍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믿음의 귀와 응답하는 자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완벽한 것까지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아기가 미숙하더라도 용감하게 걸을 때 부모는 그 행동을 기뻐하고 응원합니다. 그리고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도록 도와주시듯이 주님도 그러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곤경에서 벗어나고 주님께 한층 더 다가갈 수 있게 됩니다.

곤경에 처한 우리 각자와 우리교회, 그리고 이 세상을 부르시고 일으켜 주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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