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20 가해 연중20주일 창세45:1-15 / 로마 11:1-2, 29-32 / 마태 15:21-28 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 塞翁之馬) 우리네 인생살이는 참으로 다양하고 변화무상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울고, 웃고, 기뻐하고, 슬퍼합니다. 그래서 종종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여기서 ‘새옹지마’란 글자 그대로 ‘변방에 사는 노인의 말’이란 뜻입니다. 이 성어(成語)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국 어느 변방지역에 한 노인이 말을 기르며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기르는 말이 도망쳐 이민족들이 사는 국경너머로 가버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그 노인은 “이것이 무슨 복이 될지 누가 알겠소?”라고 말했습니다. 몇 달 후 뜻밖에도 도망갔던 말이 좋은 말 한필을 데리고 돌아오자, 마을사람들은 이를 축하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그것이 무슨 화가 될지 누가 알겠소?”라고 대꾸했습니다. 그 후, 말타기를 좋아하던 노인의 아들이 말을 타고 달리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다리 부러진 아들을 위로하자 노인은 “이것이 혹시 복이 될지 누가 알겠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민족이 쳐들어 와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장정들은 징집되어 싸움터에 나가서 전사했지만, 다리부러진 아들만은 징집을 면해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와같이 새옹지마라는 고사성어를 통해 옛사람들은 우리에게 우리인생은 길흉이 반복되니, 그 일이 일어날 때 너무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 이번 주일 제1독서에서도 우리는 요셉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고사성어가 떠올랐습니다. 오늘 독서의 주인공 요셉은 위로는 10명의 이복형들이 있고, 밑으로는 베냐민이라는 친동생이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레아와 라헬, 2명의 아내 중 라헬을 더 사랑했는데, 요셉은 사랑하는 라헬에게서 낳은 첫 아들이니 아마도 그 사랑이 남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편애는 형제들의 우애에 치명적인 법! 성경은 이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이렇게 아버지가 유별나게 그만을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형들은 미워서 정다운 말 한마디 건넬 생각이 없었다(창세 37:4)” 결국, 이러한 형제들 간의 갈등과 반목, 질투 등으로 요셉은 형들에 의해 이집트 노예로 팔려가게 되고, 형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의 옷에 짐승의 피를 묻혀서 그가 들짐승에 잡아 먹혔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지난 주일 제1독서에게 우리는 이러한 비극적 내용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요셉이 이집트 재상이 돼서 형들과 화해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그럼 지난주일과 이번주일 독서 사이 요셉에게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던가요? 구약성경을 통독하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은 이집트 왕 파라오의 경호대장의 노예로 팔렸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똑부러지는 일처리로 경호대장의 신임을 얻어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운도 잠시! 경호대장의 아내는 젊은 요셉을 집요하게 유혹하였습니다. 참으로 일생일대 커다란 시험에 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호대장 아내의 유혹에 따르자니 자신의 양심과 경호대장과의 신의를 저버리는 거고, 반대로 그 유혹을 뿌리칠 경우 누명을 받고 생명을 잃거나 감옥에 갇힐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양심을 따랐고, 결국 어렵게 자리잡은 모든 것을 다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요셉을 구렁텅이에서 그대로 놔두지 않으셨습니다. 파라오의 시중을 들던 사람들이 왕에게 잘못한 일로 걱정하고 있을 때, 감옥에 있던 요셉에게 그 일과 그들이 꾼 꿈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이에 어렸을 때부터 신비한 꿈을 잘 꾸고 이에 대한 뜻을 잘 해석하는 재주가 있던 요셉은 그들에게 닥칠 일에 대하여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과연 그의 해석대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그 일을 겪고서 시종은 참으로 용하다고 감탄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 갇힌 노예죄수 요셉의 공로를 쉽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일이 몇 년 뒤 커다란 일을 해결하는 씨앗이 될 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몇 년 뒤 이집트에 큰 가뭄이 들고 이 일로 근심하던 왕이 이상한 꿈까지 꾸며, 이에 대한 해결책을 찾았지만, 이집트에 있는 그 어느 누구도 신통한 답변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 예전에 자신의 일을 기막히게 풀이해 준 요셉이 생각난 왕의 시종은 왕에게 요셉을 추천했고, 요셉은 파라오의 걱정이자 이집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을 제시했고, 마침내 파라오의 신임을 얻게 되어 감옥에서 풀려남은 물론이거나와 나중에는 재상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어 이집트의 가뭄과 기근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독서에서 들은 것처럼 그는 양식을 구하러 온 형들을 만납니다. 형들은 그가 이집트의 재상이 되었으리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런 형들에게 자신이 형들이 팔아넘긴 아우 요셉이라고 했을 때, 형들이 받았을 충격과 공포는 실로 대단했을 겁니다. 그러한 형들에게 요셉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은 형님들의 종족을 땅 위에서 살아 남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나를 이 곳으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십니다.(창세 45: 7-8)” 참으로 엄청난 반전입니다. 그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았습니다. 요셉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내적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그가 새옹지마와 같은 굴곡진 인생을 통해 인내와 지혜를 배웠고, 그 인내의 세월을 통해 마침내 하느님이 자신의 인생을 섭리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일가친족 나아가 이 세상을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새옹지마와 같은 인생을 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희망하고, 그 희망을 위해서 어떻게 인내하며, 그 과정을 통해서 무엇을 깨닫고 변화하시나요? 오늘 독서에서 요셉은 수많은 좌절과 유혹을 겪었습니다. 심지어 오늘 들은 복음에서 이방인 여인은 예수님께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청했다가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외면까지 받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어려움 중에 주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오늘 이방인 여인처럼 때때로 주님이 침묵하시는 것이 아닌가, 주님이 내 간청을 외면하시는 것은 아닌가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방인 여인의 인내와 끈기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왜냐하면, 편리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는 현대인들은 많은 것들을 일회성으로 소비하는 데 길들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갈망하는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얻기까지 인내하고 숙성하는 과정을 굉장히 힘들어합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기도하면서 주님께 간청하는 것도 빠른 응답을 원할 때가 많고, 응답이 즉각 오지 않을 경우 어떤 이들은 기도가 응답받지 못했다고 하면서 기도를 포기하거나 다른 대체방법을 찾습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와 복음에 나오는 요셉과 이방인 여인을 봤듯이, 그 결과는 때로는 오랜 시간, 심지어 요셉처럼 새옹지마와 같은 인생의 굴곡을 거쳐 얻게 되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때로는 이방인 여인처럼 ‘하느님이 참으로 매정한 것이 아닌가!’와 같은 심정을 겪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욱 굳은 믿음을 갖고 그 시간을 이겨내야 합니다. 주님의 사도 바울 역시 숱한 역경을 겪었고 그러기에 그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격려해 주십니다: “나는 또 묻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버리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당신의 백성을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 결국은 그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로마 11: 1-2, 32)” 주님은 아버지의 편애속에 자기만 귀중하다고 생각한 철부지 요셉을 모진 세상풍파 속에서 훈련시키시어 마침내 한 나라의 재상이 되게 하시고, 자신을 사지로 내몬 형들을 감싸안을 수 있는 큰 사람으로 성장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여인의 간청을 마침내 들어주심으로써 그녀의 딸을 살리심은 물론이고, 하느님의 자비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까지 베푸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이러한 하느님의 깊은 뜻이 우리 인생의 모든 일들 속에서도 섭리하신다는 것을 믿읍시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어려울 때나 잘될 때나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주님의 사람으로 거룩하게 변화해 갑시다. 우리 인생과 동행하시며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