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03 여성선교주일 출애 2:1-10 / 로마 16:1-7 / 루가 10:38-42 활동과 기도 지난 6월 11일 서울주교좌성당에서 교구 어머니연합회 성가제가 있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몇 년 동안 못하다가 오랜만에 열린 행사였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열심히 준비해 와서 노래로 찬양하며 은혜를 받았고, 모처럼 서로 만나서 안부를 물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자매라는 것을 나누고 확인하는 뜻 깊은 자리였습니다. 이 행사에서 우리교회는 ‘이블린 언더힐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대상, 장려상 등과 같은 명칭이 아닌 유명한 성공회 여성신자들을 상 이름으로 정해서인지, 상을 받으면서도 이 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다들 궁금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가제 후 주일주보에 이블린 언더힐의 사진을 싣고 설교 전에 간단히 소개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부족함을 느끼던 차에, 대한성공회에서 매년 9월 첫 주일을 여성선교주일로 정한 이 날을 맞아 이블린 언더힐과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에 대하여 간략히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이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에 대하여 소개하자면, 1875년 영국의 변호사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킹스 칼리지 런던(King’s College Lodon)에서 역사학과 식물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녀는 젊었을 때,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신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을 신봉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참 진리를 깨닫고 회심한 뒤, 누구보다도 열렬히 그리스도교 신앙과 그 깊은 신비를 연구하고, 기도하고, 알리는 데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일생동안 약 400여 편의 글과 39권의 저서를 집필하였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신학강의를 한 최초의 여성교수이자 영국 성공회 신학생들과 남성 성직자들에게 신학을 가르친 최초의 여성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단지 지적인 분야에서만 활동한 것이 아니라 피정지도에도 탁월한 영성훈련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공회뿐만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교 교단에서도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전통과 영성분야에서 그녀는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1941년 세상을 떠난 뒤, 영국 성공회와 미국 성공회는 그녀가 세상을 떠난 6월 15일을 축일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아마도 적지 않은 분들은 이 분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간호학도들이 흰 가운을 입고 촛불을 들고 선서를 하는데, 이것을 ‘나이팅게일 선서’라고 합니다. 의사들이 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비견되는 이 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 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느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간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겠으며, 간호하면서 알게 된 개인이나 가족의 사정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나는 성심으로 보건의료인과 협조하겠으며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습니다. 근대 간호학의 선구자라고 칭송받는 나이팅게일은 1820년 영국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병들고 다친 이들을 보살펴 주겠다는 신앙의 동기로 간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간호사는 청소부, 잔심부름꾼과 같이 하대받는 직업이라서 집안의 반대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뜻을 굽히지 않고 마침내 간호사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흑해와 크림반도에 1853년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38명의 성공회 수녀님들과 전장으로 가서 다친 병사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폈습니다. 그리고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오늘날 근대간호학의 기초가 되는 체계적인 관리방법을 영국정부에 제안하였습니다. 그밖에도 근대적인 간호학교를 설립하고 각종 통계를 발전시키는 등 의료복지시스템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1910년 그녀가 서거한 뒤, 그녀의 공로를 인정한 간호사들은 그녀를 ‘근대 간호학의 대모(the godmother of modern nursing)’로 칭송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여성선교주일을 맞아 저는 성공회가 자랑하는 두 분의 여성에 대하여 소개하였습니다. 이 두 분은 오늘 우리가 들은 마리아와 마르타와도 같은 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마리아를 '관상적 삶(vita comtemplativa)'의 모범으로, 마르타를 '활동적 삶(vita activa)'의 모범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블린 언더힐은 마치 마리아와 같고,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마르타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럼, 우리교회전통의 두 축인 기도와 활동을 상징하는 마리아와 마르타는 어떤 분들인가요? 오늘 복음을 근거로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언니 마르타가 예수님 일행을 집에 초대합니다. 집안의 맏이인 마르타는 예수님을 초대하는 것부터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지 모든 일에 결정권을 갖고 있는 활동적인 여성인 것 같습니다. 이에 반해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보아 아마도 그녀는 언니에 비해 좀 내성적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발치에 앉는다는 것은 당시에는 유다인 남성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여성의 인권이 희박한 당시에 여성이 발치에 앉아 제자가 돼서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유다교 관행에 비추어 볼 때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그녀의 성격이 설령 내성적이라 하더라도 그 행동은 실로 파격적이고 용기있다고 하겠습니다. 어쩌면 활동적인 언니 마르타도 감히 엄두도 못낼 일을 동생 마리아가 한 것입니다. 그녀의 그런 행동에 대해 아마도 주님의 제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주변에 있던 다른 유다인들에겐 일종의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고, 그들은 예수께서 어떻게 반응할지 예의주시했을 것입니다. 또한 언니 마르타 역시 동생의 그런 주제넘은 행동에 대해 타박하자, 예수께서는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된다.(루가 10:42)”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성의 인권과 남녀평등사상이 당연한 현대인들에겐 이 말씀의 의미가 그리 크게 다가오지 못할지 모르지만, 2,000년 전 당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실로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여성선교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활동과 기도에 대하여 복음에 등장한 마르타와 마리아를, 성공회 여성 중에서 나이팅게일과 언더힐에 대하여 봤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여성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한 사람은 활동만, 또 다른 한 사람은 기도만 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 안에는 활동의 측면과 기도의 측면이 다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성격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활동을 더 강조해야 할 때가 있고, 아니면 기도를 더 강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활동과 기도의 관계는 이처럼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이것을 따로 떨어뜨릴 수 없습니다. 만일 분리될 경우,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고 있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가 10:41)”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본질적인 것을 놓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교회에서의 활동, 심지어 가정과 사회에서의 활동을 할 때 때론 중요한 목적을 잃고 배가 산으로 갈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 기도는 배의 방향을 바로잡아 주는 좋은 도구가 됩니다. 기도를 통해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의 빛으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행하고 있는지 되묻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를 어디로 불러주시는지 다시금 듣게 되고 그 부르심을 향하여 인생의 길,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우리 신앙의 근거이자 방향이 되시는 예수님을 향한 이블린 언더힐의 기도로써 여성선교주일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예수여, 마음에 저를 담으소서. 예수여, 눈을 들어 저를 보소서. 예수여, 손을 얹어 저를 축복하소서. 예수여, 팔을 벌려 저를 안아주소서. 예수여, 당신의 발자국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예수여, 당신의 몸으로 저를 먹이소서. 예수여, 당신의 피로 제게 힘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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