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17 가해 연중24주일 출애 14:19-31 / 로마 14:1-12 / 마태 18:21-35 정의와 자비 서양사상사를 공부하면서 느끼는 점은 서양사상은 그리스도교와 매우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전개되어 왔다는 점입니다. 특히 서양철학은 그리스도교 사상과 때론 밀접하게, 때론 적대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발전해 왔습니다. 특별히 인간의 이성과 과학을 중시하는 근대서구문명은 그리스도교 정신을 비판하면서 벗어나고자 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 중 하나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라고 하는 독일철학자입니다. 철학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이라고 하더라도 “신은 죽었다(Gott ist tot)”라는 말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니체가 이렇게 선언한 이유는 기독교 신앙은 근대 세속세계에서 쇠퇴하고 있기에 더 이상 기독교인들이 믿는 신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은 더 이상 신에게 기대서 살지 말고 인간 스스로가 힘을 쟁취하기 위하여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처럼 신의 죽음을 선언하고 홀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은 ‘권력에의 의지’ 혹은 ‘힘을 향한 욕망’이라고 번역하는 ‘der Wille zur Macht’를 추구하는 존재이어야 하며,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 이상적인 인간을 ‘초인(Übermensch)’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가 볼 때, 기독교에서 권고하는 용서, 사랑이라는 가치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패배자와 같은 약자들에게만 어울리는 ‘노예도덕’이라고 폄하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엔 인간은 본능적으로 힘과 권력을 지향하는데 노예와 약자들은 그러한 경쟁에서 도태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용서와 사랑을 말하고, 용서를 해야 저 세상에서 복을 받는다는 교리로 가르치는 것은 사람들을 무능력한 노예로 만드는 것이라고 비난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니체에 관점에 대하여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뭔가 불편하면서도 여기에 대한 반박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되지 않으신가요? 사실 어떤 분들은 기독교에 대한 지식인의 악의적인 왜곡이라고 치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독일 기독교의 중심인 루터교 목사의 아들이고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랐으며, 젊었을 때는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전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저 단순히 외면하기에는 그가 끼친 사상적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학문, 예술, 심지어 정치에까지 상당합니다. 한 예로 독일의 히틀러는 그의 사상을 자신의 국가이념의 기초로 삼기까지 해서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인 제2차 세계대전의 사상적 단초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 경쟁을 통해 승자만이 살아남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과연 우리가 믿고 실천하는 그리스도교의 가치가 니체의 말대로 폐기되어야 할까요?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가치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이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먼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이 세상과 무관한 그래서 오직 저 세상에만 활동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 제1독서 출애굽기는 하느님이 어떻게 인간역사에 개입하시는지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탈출한 히브리인들은 홍해바다에 가로막힙니다. 그러자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던 하느님의 힘이 뒤따라오던 파라오 군대 쪽으로 방향을 틀어 파라오 군대는 앞이 보이지 않아서 추격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틈을 따서 모세가 팔을 들어 올리자 하느님은 거센 바람을 일으켜 홍해바다를 갈라 놓으셨고, 히브리인들은 그 사이로 무사히 바다를 건너갔습니다. 그들이 바다를 건너는 것을 뒤늦게 본 파라오군대 역시 그들을 잡으러 물길 사이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갈라진 바다를 다시 원래대로 하셨고, 그 결과 파라오 군대는 홍해바다에 모두 수장되어 버렸습니다. 이 모든 광경을 겪은 히브리인들은 “야훼를 두려워하며 야훼와 그의 종 모세를 믿게 되었습니다.(출애14:31)” 이 일은 실로 히브리인들에게 어마어마한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을 계기로 히브리인들은 비로소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명백히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구약성경에서 출애굽기를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한 가장 핵심적인 책으로 삼은 것입니다. 동시에 이 사건은 비단 유대교와 유대민족의 근간뿐만 아니라 신약의 그리스도교에서도 핵심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제2의 출애굽’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이 세상과 무관한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역사를 통해 인간들과 함께 당신의 정의를 실현해 가시는 분이십니다. 이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 중에서 하느님은 부득불 한편에 서실 때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은 파라오라는 강자가 아니라 노예였던 히브리인들 편에 서서 당신의 정의를 실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이 보실 때 태초에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은 모두 한 자녀였는데, 인간의 죄와 탐욕으로 강자와 약자로 갈라진 것이고, 이러한 분열이 점점 심해지고 그래서 힘없는 이들의 고통의 소리에 하느님의 정의가 개입해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 정의는 겉으로 보기엔 누구를 벌주는 모습일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창조질서의 복원이자 만물의 균형을 찾는 창조주 하느님의 질서의지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때론 준엄한 심판자로 등장하시지만, 본질적으로는 자비와 사랑이신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일곱 번 뿐만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고 용서하여라.”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무자비한 종 비유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 이야기에서 자비로운 왕이 일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을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줍니다. 여기서 달란트는 예수님 시대에 통용되던 가장 큰 화폐단위입니다.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에 해당되는데 이것은 노동자가 20년 가까이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입니다. 따라서 만 달란트는 개인이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금액입니다. 또한 당시 율법에는 배상금액이 부족할 경우, 자신의 소유물만이 아니라 자신까지도 종으로 팔아서 변상하라고 규정되어 있었습니다.(출애 22:2 참조) 그 사람은 이 말도 안되는 돈을 탕감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로운 왕으로부터 이처럼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은 정반대되는 행동을 합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여기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니까 100일 동안 품삯에 대한 빚입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 데나리온으로 환산하면 6천만 데나리온이고, 노동자 하루 품삯으로 환산하면 약 16만 4천년 동안의 품삯이라는 비현실적인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겨우 100일 품삯이라는 빚을 갚으라고 무자비한 보복을 한 것입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주변사람들이 왕에게 이 일을 알리자 왕은 대노하여 자비를 철회하고 원칙대로 처리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 이야기를 마치시며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18:35)”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교회는 세례를 통해 낡은 인간이 죽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주님으로 삼겠다고 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한 형제, 자매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갈대처럼 나약한 우리들은 때론 이 정신을 잊고 과거의 이기적인 모습으로 후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예식문에 있는 기도,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실로 주님과 이웃에게 죄를 지었으며, 또한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주여,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지게 하소서”라고 진심으로 통회하고 주님과 형제자매 앞에서 뉘우쳐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에게 그런 형제자매들을 자비로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배를 시작할 때 이 기도문을 바치는 것은 바로 주님의 용서를 청함과 동시에 나 역시 내 형제자매들을 용서하겠다는 결단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는 다시금 새로운 공동체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의롭게 됨(justification)'입니다. 이제 주님의 자비로 의롭게 된 우리들은 예배 안에서 세상을 향해 중보기도를 하고, 예배를 마치면서 이 세상으로 나아가 주님의 정의를 '증거(witness)'하는 제자들로 파견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와 함께 이 세상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십니다. 이것이 니체가 말한 더 이상 죽은 종교, 노예도덕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교 본연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길입니다. 대자대비하시고 정의의 원천이신 하느님과 그 정신을 구현하는 교회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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