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실천적 무신론자와 하느님 나라(가해 연중28주일)
작성일 : 2023-10-14       클릭 : 155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31015 가해 연중28주일

출애 32:1-14 / 필립 4:1-9 / 마태 22:1-14

 

 

실천적 무신론자와 하느님 나라

 

 

오늘날 대한민국의 종교현실은 예전만 못합니다. 2022년 인구 총 조사 연구자료에 따르면, 2022년 종교인구는 종교인 37%, 무종교인 63%라고 합니다. 종교인 중에서도 기독교 인구를 보면, 2012년에는 전체인구 5,095만명 중에서 22.5%1,146만명이었습니다. 그런데 10년 뒤인 2022년에는 전체인구 5,163만명 중에서 15%774만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만일 이런 추세라면 10년 뒤인 2032년에는 전체인구 5,108만명 중에서 10.2%521만명으로 더 줄어들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비단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도 서구 국가들처럼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세속화될수록 탈종교화의 속도가 가속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추세에 대하여 종교인들 특별히, 기독교 신자들은 세상이 점점 무신론 사회로 되어가고 있는 것에 대하여 걱정하고 있습니다. 세계종교인구조사 자료에 의하면, 전 세계인구의 약 16%가 자신을 무신론자로 밝히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점차 그 비율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럼, 무신론이란 무엇일까요? 글자 그대로 무신론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신의 존재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상입니다. 무신론자들은 신을 비롯한 모든 영적 존재를 부정합니다. 이와 반대로 유신론자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무신론자들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과학의 발달로 어떤 이들은 과학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증거를 명확히 할 수 없는 신의 존재는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세상에 만연한 폭력과 전쟁과 같은 참상을 목격하고 겪으면서 신에 대한 반발과 회의로 무신론자가 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신을 믿는다는 것이 나에게 무슨 이득이 있느냐고 하면서 아무런 흥미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들은 현대사회가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물리적으로 파악된 것만이 진리라는 과학적 사고방식의 영향 그리고 종교 간 또는 종교 내부의 갈등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함께 물질적 풍요와 개인주의 풍조의 확산으로 인해 증폭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온전히 자주적으로 그리고 독립적으로 그 자신이 신과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처럼 인간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노쇠하고 결국 죽는 유한한 존재이며 동시에 다른 모든 생물과 무생물들 간 상호의존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이 신을 배척한다는 것은 온전히 그 스스로 자립할 수 없는 인간의 속성 상 또 다른 대체물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 1독서에서 들은 황금 송아지 사건입니다.

이집트 노예였던 히브리인들은 홍해를 건널 때 엄청난 자연의 위력을 체험했고,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 기적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늘 보던 영도자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러 산에 올라가 오랫동안 내려오질 않자, 그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론 사제에게 몰려가 “어서 우리를 앞장설 신을 만들어 주시오.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온 그 어른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출애32:1)라고 불안을 호소합니다. 그들은 왜 이리 불안해했던 걸까요? 이들의 불안감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는 우선 신에 대한 두 가지 속성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에 있어서 하느님은 계시된 신(Deus Revelatus)’이며 동시에 숨겨진 신(Deus Absconditus)’입니다. 전자는 성경,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교회 등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반면에 후자는 인간의 지식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무한하고 신비로운 하느님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물질세계에서 살아가는 유한한 인간은 하느님이 당신을 숨기실 때 당황하게 되고 불안하게 됩니다. 그래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만질 수 있는 존재를 찾게 되며, 만일 그러한 존재를 통해 심리적 안정과 물질적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면, 더 더욱 안심하고 의지하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히브리인들은 그들과 늘 곁에 있던 모세가 안보이게 되자, 주변 다른 민족들이 했던 방식을 따라서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거기에 의존한 것입니다. 이 황금 송아지 사건으로 히브리인들이 그동안 믿고 따랐던 대상이 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아니라 보이는 모세였다는 것이 폭로된 것입니다.

사실, 황금 송아지 사건은 오늘날 종교에서도 왕왕 발견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예컨대, 어떤 목회자가 모세와 같은 훌륭한 인물로 추앙받다가 그 추종이 어떤 경우에는 이상한 곳으로 흘러서 황금 송아지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또는 어떤 관습과 교리가 처음에는 좋은 취지에서 시작했다가 세월이 흘러 황금 송아지로 변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우리가 하느님의 속성 중 하나인 숨겨진 하느님이란 심오한 신비를 깊이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아는 것도 불완전하고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도 불완전하지만 완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은 사라집니다(1고린13:9-10)

그러면 완전한 것이 온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혼인잔치라는 기쁘고 즐거운 곳으로 비유하시면서 그러한 나라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 나라는 지금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잘 몰라서 두렵고 불안한 그 무엇이 아니라, 혼인잔치처럼 기대가 되고 설레게 하는 희망인 것입니다. ‘계시된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혼인잔치의 비유를 통해 숨겨진 하느님의 신비한 나라로 우리가 마음을 열고 그 초대에 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그 나라에 시큰둥합니다. 복음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초청받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때려 주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마태22:5-6) 여기서 밭으로 가는 것은 세상일에 몰두하는 것이고, 장사하러 갔다는 것은 세상에서 활동함으로써 이익 얻기를 갈망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하는 일에 방해된다고 패거나 죽이기까지 하는 적대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 초대의 범위가 확장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 중 어떤 이들은 다시 쫓겨났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초대교회 상황으로 볼 때, 예수님 승천 후인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함락되어 불탄 사실을 목격한 교회 공동체가 유대인들의 편협함이 심판 받았다고 보고, 하느님 나라 초대를 온 민족 에게까지 넓히는 계기로 삼은 것입니다. 후자는 선교를 통해 이방인들을 불러 모으는 과정에서 교회 안에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혼재되어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언급한 혼인 예복은 일종의 상징적 은유이며, 그 뜻은 사랑과 정의의 덕을 말합니다. 오늘날 일부 무신론자들이 생기는 원인이자 교회의 전도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들을 실천적 무신론자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실천적 무신론자란 머리와 입으로는 하느님의 존재를 알고 고백하지만, 행동으로는 하느님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하느님나라를 향해가는 교회에게 있어서 실천적 무신론자들이 제일 심각한 문제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지난 주일 우리는 강화교회 130년 역사상 처음으로 감리교와 성공회가 교환예배를 통해 우리가 비록 예식이 다르고 일부 제도가 다르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자매임을 고백하는 은혜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것은 무신론자들이당신들은 하느님을 믿으면서 왜 서로를 비방합니까?”하는 질책을 불식시키는 계기가 될 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울이 권면하신 말씀,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필립 4:4-7)를 명심하고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불안감으로 황금 송아지를 하느님으로 오인하여 잘못된 신앙에 빠진 히브리인들이나, 영적인 혼인 예복도 입지 않고 하느님 나라 혼인잔치에 온 그런 사람들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 혼인잔치로 우리를 불러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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