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29 가해 연중30주일
신명 34:1-12 / 1데살 2:1-8
/ 마태 22:34-46
정의와 사랑
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로켓포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은 현재 이스라엘과 가자지역 뿐만 아니라 중동전역에까지
전쟁의 공포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제5차
중동전쟁을 넘어 제3차세계대전으로까지 갈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생기고 있는데, 이스라엘에서는
수십 명 사망에 수백명 부상, 가자 지구에선 수백명 사망에 수 천명 부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전체 사망자 중에서 어린이가 절반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성공회는 이 지역이 예루살렘 교구 관할 지역인데, 지난 10월 17일 성공회 예루살렘 교구에서 운영하는 알 알리 병원이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병원건물과 의료장비가 파괴되었으며, 의료진과 환자들이 큰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알 알리 병원은 가자 지구에서 가장 큰 병원 중 하나로서 이번 공격으로 생명을 살리는 인도적 활동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처럼 증오에 찬 양측의 보복전에 대하여 10월
18일 세계성공회를 대표하여 저스틴 웰비(Justin Welby) 캔터베리
대주교는 무고하게 희생당하고 있는 이들을 애도하면서 잔혹하고 광기에 찬 전쟁을 조속히 중단하고 정의와 평화를 위해 기도하길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중동지역의 역사에 대하여 잘 모르는 한국사람들은 연일 계속되고 있는 분쟁과 테러, 전쟁 등의 뉴스를 접할 때마다 이들이 왜들 그렇게 죽기 살기로 미워하고 싸우는지 잘 납득이 되질 않을 겁니다. 이것은 크게 먼 원인과 가까운 원인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먼 원인은
오늘 제1독서 신명기에 언급한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모세의
영도로 이집트 땅을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기원전 13세기부터 이 지역에서 살았던 것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66년부터 70년 간 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전쟁을 벌인 유대인들은 로마군에게 철저히 진압당하고 고향에서 강제추방을 당해 20세기 초까지 세계 각지로 유랑생활 하다가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1947년 마침내 선조들의 땅에 이스라엘을 건국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 살아오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어느 날 자기선조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와서 나라를 세우고 자신들을 차별하고 몰아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반발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분쟁의 역사적 원인입니다. 거기에다
이스라엘은 유대교를 믿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랍인들처럼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종교적인 문제까지 얽혀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이 지역에 두 개의 국가를 설립하여
평화롭게 공존하길 바라고 있지만, 양측의 입장차가 워낙 커서 실현되기가 아주 힘든 상황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과 아랍민족 간의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대립, 유대교와 이슬람교 간의 종교적 대립으로 야기된 폭력과 전쟁을 보면서 혹자는 정의의 하느님을 믿는 완고한 두
종교의 속성과 이를 더 증폭시키는 종교와 정치영역에 있는 근본주의자들이 큰 문제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유대교 근본주의자들은 구약성경에서 약속의 땅에 다윗왕국과 성전을 재건하라는 하느님을 말씀을 팔레스타인들을 차별하고
몰아내는 정당성으로 삼습니다. 이런 행태 때문인지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은 정의의 하느님을 말하고 있지만, 신약은 사랑의 하느님을 말하고 있다고 하면서 구약과 신약을 마치 대립적으로 인식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정의와 사랑은 과연
양립할 수 없는 걸까요? 영어로 justice는 라틴어 유스(jus)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이 말은 권리, 법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justice는
나의 권리가 침해당하거나 분쟁이 일어났을 때, 법률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속성을 내포합니다. 그런데, 신약성서 원어인 그리스어에서 정의라고 하는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란 단어는 태도와 방향이 올바르고, 삶이 가지런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볼 때, 정의의 성서적 의미는 단지 법 준수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올바르게 사는 것이요,
더 나아가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게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물론 분쟁이 생겼을 때, 법적 해결과정도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게
전부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대사회에서 이른바 정의(justice)와
관련된 사태들은 결국 권리 싸움이고 법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더욱이
권력과 권력이 벌어지는 각축장이 된 국제사회에서 누가 그 경쟁을 규정할 권리를 갖느냐가 유일한 문제가 될 때, 거기에는
이미 권리를 빼앗긴 측의 상실이라는 불행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들의 상실감은 어쩌면 그런 상황이
빚은 비극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가 나에게 상처를
입혔으니 나도 너에게 상처를 입힐 거야. 그러면 너는 다시 나에게 상처를 입히겠지. 그러면 나는 다시 너에게 상처를 주겠어”라고 외치는 폭력의 악순환으로
전염된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제 정의는 그러한 폭력을 정당화해주는 단어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전에 … 모역을 당했으나 여러분에게 가서는 심한 반대에 부딪히면서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담대하게
하느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 마치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처럼 여러분을 부드럽게 대했습니다 (1데살 2:2, 7)”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태도는 앞서 언급한 자기 권리를 찾기 위해 정의를 부르짖으며 상처를 상처로 대하는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게 올바른 모습으로 복원시키려는 성서의 정의(δικαιοσύνη)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주님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어야 한다는 ‘의화(justification)’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사실, 성서가 말하는 정의는 사랑으로 연결됩니다. 예수님이 가장 핵심적인
계명이 뭐냐고 율법교사가 물어봤을 때,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답변하신 이유는 죄로 물든
우리가 그러한 사랑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정의로운 길을 걸어가야만 그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안에 포함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은 오늘날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나 노래가사에 나오는 사랑보다 더 깊은 차원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연인 간의 사랑, 부부 간의 사랑, 가족과 친지 간의 사랑 등 대체로 뭔가 공통분모가 있는 개인이나 계층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나 만일 이런 식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말한다면,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이유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참 진리이고, 참
사랑이고, 참 아름다움 자체이신 하느님은 그에 걸맞은 대상만이 사랑의 자격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신과 너무나 다르며, 참과 거짓이 뒤섞여 있는 모순된 존재이고, 한계가 뚜렷한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t
of Alexandria) 성인은 이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의 위대한 신비라고 설파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의 신비를 깊이 깨닫는다면, 우리는 사랑과 정의를 우리와 비슷한 사람, 우리와 가까운 사람에게만
국한시키고 나머지는 배척하는 협소한 모습을 극복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폭력과 전쟁을 종식시킬 영적인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또한 나와 다른 너, 우리와 다른 너희를 포용하고, 대화하고, 공생할 수 있는 관대함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러한 가치관을 가지고 오늘날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바꿔 나가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랑과 정의 그리고 평화를 향한 우리의 선교적 임무일 것입니다.
정의와 사랑의 원천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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