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05 가해 연중31주일
여호 3:7-17 / 1데살 2:9-13
/ 마태 23:1-12
예수님의
리더십, 종교 개혁자의 리더십
성공회 기도서를 보면 10월
31일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와 종교개혁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수이자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수사신부인
루터는 면벌부(Indulgence) 발행에 대해 항의하는 ‘95개조
논제(Ninety-five Theses)’를 독일 비텐베르크(Wittenberg)
교회 정문에 붙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러 온 사람들은 이 반박문을 읽었고, 그 소문은 삽시간에 독일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 사건은 유럽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루터가 주장한 95개조 논제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면벌부는 단지 교회가 부과한 형벌을 사면하는 거지, 진정한 참회와 회개를 대신할 수 없다. 둘째, 면벌부를 구입하는 행위는 믿음의 본질이 아니다, 셋째, 면벌부에 의존하는 구원은 참된 구원이 아니다. 이처럼 루터는 이
논제를 통해 면벌부 판매가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면 당시
천주교는 왜 면벌부를 판매하였던 걸까요? 16세기 교회는 십자군전쟁의 지원, 성베드로 성당을 비롯한 교황청 건물의 확장 등으로 재정지출이 늘어나서 이를 충당할 더 많은 재원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면벌부를 통해 교황이 죄를 사면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교회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의도와 더불어 당시 지옥에 떨어질까 봐 두려워하던 대중들에게 자신들이 지은
죄의 벌을 줄이고 천국에 더 빨리 가고 싶은 신자들의 기복신앙도 그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종교개혁은 그동안 교회가 잊고 있었던 신앙과 교회의 본질에 대해
반성하게 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라는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므로 개혁정신은
16세기 종교개혁시기에 생긴 것이라기 보다는 그 이전부터 우리 그리스도교에 있는 정신인 것입니다. 이 개혁정신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사도 바울과 초대교회까지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까지 도달합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러한 개혁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권한을 지닌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에 대하여 그들의 언행 불일치와 그들이 행하는
관습을 비판하십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들이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이들이 성경(Tora)을 지키기 위해 613개나 되는 규정을 만들었는데, 이 때문에 율법이 사람들에게 해방과 자유가 아닌 억압과 구속을 시키는 무거운 짐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비판하십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에 있는 유대교인들 중에 이른바 열심한 자들은 검은 모자, 검은 옷에 성경구절이 담긴 성구갑을
부착하고 기도합니다. 이러한 풍습은 예수님 시대에도 이미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성구갑을 크게 만들어 늘 착용함으로써 남들한테 경건한 신자임을 자랑하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또한 당시에는 학식 있고 덕망 있는 사람을 잔칫집 상석에 앉히는 풍습이 있었는데,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활용하여 늘 그러한 자리만 탐하였습니다. 그리고 천주교나 성공회에서 성직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듯이, 유대교에서는 위대한 선조들과 대학자들에게 “아버지”라는 존칭을 붙입니다. 또한
한국어로는 ‘스승님’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원 뜻은 ‘위대한 사람’이란 뜻을 지닌 ‘랍비(rabbi)’라는 명칭으로도 부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남용함으로써 예수님으로부터 영적 자만에 빠졌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을 향하여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고 하시면 섬김의 리더십을 설파하십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러한 섬김의
리더십을 실천한 초대교회 시기 사도 바울과 그 동역자들의 모범적인 모습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동안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노동을 했습니다. … 우리는 자녀를
대하는 아버지처럼 여러분 하나하나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생활을 하도록 권고하고 격려하고 지도했습니다.
(1데살 2:9, 11)”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 사람들은 이른바 ‘더
빠르고(citius)’, ‘더 높고(altius)’, ‘더
강한(fortius)’ 무한 경쟁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남보다 더 우월한 지위에 올라 지배하고자 합니다. 이 성공의 길을 쟁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때론
진리를 증언할 때 외면하기도 하고, 자신을 낮추어 봉사할 때 회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신들만의 욕망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설령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성공할지 몰라도
우리사회, 우리 교회, 우리 가정은 점점 힘들어져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질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에 너가 없으면 내가 없고, 우리가 없으면 개인은 고독한 존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말씀처럼 “짐을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려 하지 않는(마태23:4)”
모습은 결국 우리 모두에게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의 용기 있는 증언은 바로 타성에 젖은 교회와
사회를 흔든 커다란 행동이었고 교회를 다시 정신차리게 하는 역사적 반성이 되었습니다. 또한 오늘 제2독서에 나타난 사도 바울과 동역자들의 헌신은 오늘날 교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섬기는 리더십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으로써 예수님은 이 리더십을 말씀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여주셨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섬김의 리더십을 통하여 세상을 향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내년 봄 서울교구는 새로운 교구장 주교를 선출하고 축성할 것입니다. 노령화와 인구감소, 세속화와 종교인구의 감소 그리고 기후위기로 인한
인간과 모든 생명들의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는 이 어려운 시기에 루터와 같이 용기 있게 진리를 증언하고, 사도
바울처럼 헌신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섬김의 리더십을 구현할 주님의 종이 기름부음 받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를 하실 때, 우리
역시 루터처럼, 사도 바울처럼,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처럼 개혁될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시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또 만물을
개혁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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