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그 날 이후 바라빠는 어찌되었을까?(왕이신 그리스도주일)
작성일 : 2023-11-26       클릭 : 206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에제 34:11-16, 20-24 / 에페 1:15-23 / 마태 25:31-46

왕이신 그리스도주일

 

그 날 이후 바라빠는 어찌되었을까?

 

 

이스라엘에서 목자들은 양과 염소를 함께 방목하다가 저녁에는 갈라 놓습니다. 왜냐하면 염소는 따뜻하게 해 주어야 하고, 양은 털이 많아서 열린 장소를 선호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최후심판 때에 의인과 악인을 마치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세운다는 은유는 아마도 이스라엘의 유목풍속을 반영한 표현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최후심판 이야기는 구약의 유대인들이 언급한 최후심판과는 좀 다릅니다. 유대교의 전통사상, 예컨대 에제키엘 예언서 9장을 보면 마지막 날에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어 해방시키시고 다른 민족들은 심판하실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구분 대신에 형제들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푼 것에 따라서 심판하실 거라는 보편적인 잣대를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굶주리고 목말랐을 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가 되어 힘들고 외로울 때 따뜻하게 맞아주며,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며,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 준 것이 구원을 판가름 짓는 척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눈앞에 배고프고, 외롭고, 헐벗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보일 때, 우리는 우리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발동해서 도와준 것이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사람을 비롯하여 온 세상 만물과 내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는 분이라서 그것은 사실 하느님을 도와드린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행은 눈에 보이는 형제에게 위로를 줌과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는 크나큰 기쁨을 드리는 행위가 됩니다.

이처럼 평소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던 하느님이 역사의 마지막 날엔 마침내 당신을 온전히 드러내십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왕이신 그리스도주일에 걸맞게 하느님을 참된 목자(에제키엘서 참조)이시며, 권세와 능력과 주권의 여러 천신을 지배하고 현세와 내세의 모든 권력자들 위에 군림하시는 그리스도(에페소서 참조), 모든 민족들을 불러 놓고 왕좌에 앉아 심판을 하시는 임금(마태복음 참조)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근엄하고 능력 있고 전능한 모습을 갖추고 있어서 어떤 면에선 우리를 겁먹게 하거나 위축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성경말씀, 특별히 최후의 심판 장면에 대해 관상하다가 예수님이 심판 받으시는 모습이 함께 떠올랐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매년 고난주일과 성금요일에 읽는 수난복음 중에 나오는 광경입니다:  

여기서 심판관은 로마사람 빌라도(Pilate) 총독입니다. 그리고 재판석 앞에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성난 군중들이 고함지르고 있습니다. 그들 앞에 두 사람이 서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바라빠(Barabbas)라는 예수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리스도라는 예수입니다. 빌라도가 둘 중에 누구를 풀어줄까 묻습니다. 그러자 군중은 바라빠를 선택합니다. 이에 빌라도가 그러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군중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칩니다. 이에 빌라도가 그 사람의 잘못이 무엇이냐고 물었으나 군중은 그에 대한 대답 대신 무조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합니다. 이성을 상실한 집단적 광기로 폭발직전인 상황 속에서 빌라도는 피에 굶주린 맹수들에게 먹잇감 던지듯 예수를 군중들에게 넘겨줍니다. (마태 27:15-25 참조) 이것이 나사렛 사람 예수에게 내려진 최후의 심판이었습니다. 이 심판은 오늘 우리가 들은 최후의 심판과는 완전히 판이합니다. 모든 권세를 굴복시키고 온전한 정의를 행한 역사의 심판자와 군중의 기세에 눌려 타협하는 비겁한 현실세계의 심판자, 최후의 심판에선 그 행동에 따라 구원여부가 판가름 나지만 현실의 재판에서는 의인이 악인으로 악인이 의인으로 뒤바꿔 버리는 비극이 벌어집니다.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는 기가 막힌 현실! 예수의 재판은 이러한 부조리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한편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바라빠는 어찌 되었을까요?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그는 아마도 젤롯당(Zealot)이라고 불리는 로마에 저항하는 무장투쟁단체 소속 인물이었을 거라고 합니다. 마치 오늘날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압제에 대하여 테러와 전쟁 등의 방법으로 항거하는 하마스(Hamas)와 같은 팔레스타인 무장저항단체와 같다고 할 것입니다.

금요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 십자가형이라는 끔찍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바라빠는 그날 오전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 덕분에 풀려났고, 그날 저녁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서 그들과 함께 안식일을 맞이했습니다. 단 하루 사이에 그는 죽음에서 삶으로 돌아왔고, 모든 것이 꿈만 같았을 것입니다. 가족들은 그를 살려주신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젤롯당 동지들은 그를 축하하면서 로마인들과 그 앞잡이들에게 복수하는 일을 계속하자고 제안했을 것입니다. 그럴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요? 어쩌면 그는 그날 오전 생과 사가 갈라지는 시점에서 자신처럼 그 자리에 서 있던 또 다른 사람 예수의 얼굴과 그 눈빛을 봤을 겁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매고 골고다 산으로 향하던 예수를 보면서 그는 자유의 몸이 되어 길을 걸어갔을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 멀리 산 정상에서 고통스럽게 소리치며 죽어가는 예수의 목소리를 들으며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바라봤을 겁니다. 이러한 일련의 충격적 경험은 어쩌면 바라빠의 영혼 깊숙이 각인되어 그에게 다음과 같은 깊은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신념으로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는 이민족들과 그들의 하수인들에게 피의 복수를 했다. 이런 노력과 희생으로 우린 기존질서를 흔들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과연 새로운 질서를 세울 수 있을까? 폭력은 폭력을 낳게 되고, 결국에는 우리는 우리가 저지르는 폭력에 사로잡힐 지 모를 거야.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 대신 죽은 나사렛 사람은 나처럼 폭력으로 복수를 외치지 않고 원수 마저도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런 그를 유대민족의 지도자들과 군중들은 왜 두려워했을까? 최근에는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죽었던 예수가 부활했다고 하면서, 예전에 도망쳤던 그 비겁함을 어디 가고 당당하게 예수를 증언하고, 그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더 나아가 이제는 유다인 뿐만 아니라 이방민족들도 그 예수를 믿고 그 가르침대로 살고 있질 않는가?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 이 세상은 미움과 증오, 복수의 악순환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고통받고 있는 바라바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우리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러한 바라빠와 같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왕으로 재림하시기 전에, 먼저 당신 스스로 불의와 광기로 미쳐버린 이 세상의 심판대 위에서 우리를 풀어주시고, 당신이 대신 그 불의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더 이상 미움과, 증오와, 복수와, 상대를 누르고 싶은 그 마음의 덫에서 해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한 해를 마감하는 왕이신 그리스도주일에 그동안 우리를 옥죄고 있는 악순환의 사슬에서 벗어나도록 간구합시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향해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위로와 용기를 북돋우는 주님의 사람들로 거듭나도록 기도합시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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