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구유에 대한 신학적 성찰(성탄 밤)
작성일 : 2023-12-24       클릭 : 120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0231224 성탄 밤

이사9:1-6 / 디도2:11-14 / 루가2:1-20

 

 

구유에 대한 신학적 성찰

 

오늘날 우리는 교회보다도 백화점이나 거리에서 성탄 분위기를 더 느끼는 것 같습니다. 교회력으로 대림절이 시작되기도 전에 백화점과 상점, 그리고 거리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크리스마스 장식과 캐롤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애는 잘 모르지만,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한다는 이 시즌이 되면 덩달아 기뻐합니다. 그리고 상인들은 크리스마스와 연말의 이러한 흥겨운 분위기를 띄우면서 매출을 올립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세속화된 크리스마스 풍경 중 상당수는 기실 교회의 오랜 크리스마스 풍속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아기 예수를 구유에 모시는 풍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 근거하고 있는 이 풍습은 1223년 이탈리아의 그레치오(Greccio)에서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가 처음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스라엘로 성지순례하고 돌아와서 예수님이 탄생하셨던 마구간을 설치하고 아기 예수, 마리아, 요셉, 목동, 천사 등을 모형으로 만들어 구유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성탄 밤 이 구유 앞에서 미사를 하고 신도들과 성탄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 후 이 풍습은 유럽전역으로 퍼져 나가서 성탄절을 대표하는 풍속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복음 성탄이야기에서 예수님이 마구간에 태어나셨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전통가옥구조와 거기에 있는 마구간을 떠올릴 것입니다. 우리네 마구간은 사람사는 방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어서 온기도 없는 차갑고 쓸쓸하고 냄새가 심하게 나는 곳이라서 여기에서 출산하는 마리아는 그 얼마나 비참한 심정이었을까, 그리고 아무리 방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렇지 집주인이 어찌 그런 장소로 안내했단 말인가, 거기다 그런 곳을 덥석 받아들인 요셉은 도대체 생각이 있는 사람인가 등등. 여러가지 불편한 느낌이 들었을 겁니다. 저 역시 예전에 이 대목을 들을 때 마다 그런 감정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스라엘의 집구조를 알게 되면, 그런 오해가 좀 누그러질 것입니다. 먼저 알아야 될 것은 고대 중동지방은 유목문화라서 나그네를 후히 대접하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 사람들은 외지에서 온 나그네들을 잘 대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호구조사령이 내려지고 아마도 마감시기가 다가올 수록 사람들이 몰려들자, 베들레헴 사람들은 나그네들을 대접하는데 애를 먹었을 겁니다. 더욱이 베들레헴과 같은 작은 마을은 순례객들로 늘 붐비는 예루살렘과 달리 숙박업이 발달되지 않았고, 그래서 숙소를 구하기는 하늘에 별따기였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에는 전문 숙박업소가 거의 없어서 아마 일반 가정집에 머물 수 있는 지 알아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어 성경엔 이곳을 여관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원래 성경 원어인 그리스말은 카탈루마(κατάλυμα)’라고 하는데, 그 뜻은 손님방, 객실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일반 가옥 안에 있는 손님이 머무르는 방입니다. 이 방은 별채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건물 안에 있으며 동시에 가축들이 있는 방도 역시 한 건물 안에 같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낮과 밤의 온도차가 극심한 사막기후 때문에 돌과 흙벽돌로 두껍게 벽을 지어서 추위와 더위를 막아야 했고, 그래서 마구간도 사람사는 방 바로 옆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집구조를 이해하고 오늘 복음 장면을 상상해 본다면, 낮에는 햇볕으로 덥다가 밤이 되어 뼛속까지 한기가 드는 중동의 기후속에서 곧 출산이 임박한 요셉과 마리아 부부의 딱한 처지를 본 집주인은 다른 방은 이미 다른 사람들로 꽉 찾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 대안으로 가축들을 옆집에 부탁해서 내보내고, 그 방을 얼른 깔끔하게 치워서 안심하고 출산할 수 있도록 했던 것 같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몰려들어 어쩔 수 없이 마구간에서 출산할 수밖에 없었지만, 사람과 가축이 함께 거주하는 중동의 가옥구조 상 우리나라 마구간과 같은 그렇게 열악한 곳은 아니고, 좀 누추하지만 소박한 곳이었을 거라고 상상해 봅니다.

한편, 오늘 복음 중 후반부에는 마을 외곽 들판에서 양떼를 지키던 목동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은 하늘에 나타난 천사들의 모습과 그 목소리를 듣고 마을로 와서 태어난 아기 예수를 보고 놀라고 기뻐합니다.

저는 이러한 일련의 광경을 보면서 이것이 하느님의 구유라고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은 먼저 요셉과 마리아의 보호가 필요했습니다. 또한 집에 있는 가축들을 내보내고 산모를 위해 방을 내 준 마음씨 착한 집 주인의 보호가 필요했습니다. 여기다가 비록 사회적으로는 율법도 못 지키는 부정하고 천대받는 목자들이었지만 이들은 아기의 탄생을 함께 기뻐해 줬을 뿐만 아니라 베들레헴의 지리와 사정을 잘 아는 이들은 머나먼 길에서 온 동방박사들을 잘 안내했을 거고, 심지어 헤로데 군인들이 잡으러 오기 전에 아기의 부모들이 아기를 데리고 안전하고 빠른 길로 탈출할 수 있게 도와줬을 거라고 상상해 봅니다. 이것들이 하느님이 안전하게 이 세상에 오신 구유인 것입니다.

이제, 이 구유는 2000년이라는 시간을 거치고, 이스라엘을 넘어 다른 곳으로 멀리멀리 전파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마르코, 마태오, 루가, 그리고 요한 등의 복음서의 저자들은 이 기쁜 소식을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보는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들음으로써 시간과 공간의 벽을 넘어 하느님이 어떻게 세상에 오셨는지 알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Martin Luter)성경은 그리스도를 담고 있는 구유다(Die Bibel ist die Krippe Christi)”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느님과 소통하기 위한 수단이고 매개입니다. 가축들이 구유 안에 있는 여물로 배를 채우듯이 우리는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영혼의 양식을 채웁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구유에 누우셨다는 것은 우리를 깊은 깨달음으로 안내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영성체 때 우리가 주님의 성체와 보혈을 영하듯이, 구유는 주님의 몸과 피가 들어있는 성배(聖杯)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 나아가 구유는 우리 인간과 모든 동물이 먹는 음식이 단지 육체의 배만 채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이 하느님이 창조하신 거룩한 물질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이것이 구유에 계신 아기 예수가 우리에게 주는 육화(Incarnation)의 신비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신비를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가 소박하게 꾸민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는 백화점과 상점에 예쁘게 꾸며져 있는 성탄장식보다는 화려하지 못하고 그래서 웬 지 모르게 촌스럽고 투박할지 모르지만, 그 옛날 베들레헴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우리를 그 당시 목동들과 동방박사들이 느꼈던 그 경이로움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또한 이 구유가 실은 영성체 때 주님을 모시는 나의 구유임을 깨달으시 길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단지 영성체 할 때만 경건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먹는 음식 그리고 그 음식을 가족과 이웃과 함께 먹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신성한 행위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양식으로 구유 안으로 오신 아기 예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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