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성지가지를 태우며(재의 수요일)
작성일 : 2024-02-14       클릭 : 156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40214 재의 수요일

요엘 2:1-2, 12-17 / 2고린 5:20-6:10 / 마태 6:1-6, 16-21

 

성지가지를 태우며

 

 

불멍이란 신조어를 들어 보신 적 있나요? ‘장작불을 멍하니 본다’, 혹은 불을 보며 멍 때린다라는 뜻인 불멍이란 말은 언제부터인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습니다. 서양의 전통적인 집은 벽난로가 있어서 거기에 통나무를 때어 방안을 훈훈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집들은 벽난로 대신 보일러에서 나온 온수가 라디에이터(radiator)를 지나면서 열을 방출하는 방식으로 난방이 돼서 이젠 벽난로가 있는 집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은 온돌 혹은 구들로 난방을 하는데 온돌은 따뜻하게 데운 돌’, 그리고 구들은 구운 돌이란 뜻입니다. 이 방식은 아궁이에서 불을 때우면 열기와 연기가 방 구들장 밑으로 난 고래라고 부르는 고랑을 지나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방식입니다. 또한 우리 온돌은 서양 벽난로와는 다르게 연기를 높은 굴뚝으로 바로 내보내지 않고 불을 눕혀 기어가게 만들어서 방바닥을 오랫동안 따뜻하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온돌방법을 현대화한 우리나라 난방기술과 문화가 요사이 전세계인을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나서 자란 저는 어렸을 적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약 3년 정도 시골에서 산 적이 있습니다. 그곳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아궁이가 있는 전통 한옥집이었습니다. 아궁이에는 큰 솥이 있어서 저는 사랑채에 있는 아궁이에 짚과 나무 등으로 불을 때서 큰 솥에 소여물을 끓이고 방을 데웠습니다.

불 땔 때 타 들어가는 볏짚과 나무를 바라보면서 저는 요샛말로 자주 불멍상태가 되었습니다. 좀 묘한 중독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인터넷에서 불멍이란 검색어를 치면 통나무가 타는 것 외에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영상들이 꽤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아마도 바쁜 일상을 사는 도시인들에게 이런 영상은 불멍상태로 복잡한 생각을 잠시 내려놓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재의 수요일을 준비하면서 매년 그래왔듯이 저는 올해도 성지가지를 태웠습니다. 이 성지가지는 전() 해 성지주일날 사용하고 각 가정에 걸어 놨던 것들을 수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가게에서 사다가 태우면 되지 번거롭게 굳이 작년에 썼던 성지가지를 수거해서 태울까 생각해 봤습니다. 그것은 일년간 걸려있는 동안 완전히 건조된 가지라서 태우기가 용이하다는 기능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저는 여기엔 우리가 성찰할 수 있는 어떤 신앙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고난주일이 시작하는 첫날인 성지주일에 2000년 전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고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마르 11:10)라고 환호했던 군중들의 모습을 재현합니다. 그리고 그날 수난복음을 읽을 때 태도가 180도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마르 15:13)라고 악을 쓰며 외치는 모습도 재현합니다. 이처럼 열렬한 환대와 극단적 증오가 교차할 때, 우리가 흔들었던 나무는 예수를 못박아 매다는 나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는 이제 불에 타 재가 되어 그 생명을 다하고 한줌 재로 되어 버립니다. 마치 예수의 생명이 끝난 듯 말입니다.

이와 같이 저는 성지가지를 태우면서 타 들어가는 나무 그리고 재로 변하는 과정을 멍하니 보다가 불현듯 성지주일 예루살렘 입성부터 성금요일 십자가 상의 죽음과 무덤에 묻힐 때까지 예수님이 걸으신 마지막 길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그 과정 안에 있는 인간들의 생각과 감정의 변화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우리의 병도 고치고, 먹을 것도 주고, 나아가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 같은 이방인들을 몰아내서 우리를 잘 살게 해줄 기대로 열렬히 환호하는 그 기대와 감정을 느껴봅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생각했던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자 실망하고, 마침내 전능한 신을 참칭한 불경한 자로 매도하고 그러기에 우리 눈에서 사라질 존재로 폐기 처분해버리려는 비정함도 느껴봅니다. 그렇지만 그 기대와 감정이 열렬한 환호이든 지독한 증오이든 간에 결국에 가서는 모든 것이 한줌의 재로 허무하게 끝났다는 것도 느껴봅니다. 결국, 재는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성지가지가 상징하듯 그것은 우리의 극단적으로 모순된 감정으로 인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간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인간의 감정들이 재처럼 얼마나 덧없고 허무하고 유한한 것인가 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허무함을 이마에 바릅니다. 그것을 이마에 바를 때 우리는 다음의 말씀을 다시금 듣습니다: “인생아, 기억하라.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다. …… 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증언, 모독과 같은 여러가지 악한 생각들이다. (마태 15:11, 18-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전통적으로 칠죄종(七罪宗), 즉 죽음에 이르는 7가지 대죄(大罪)를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7가지 대죄란 교만, 탐욕, 색욕, 분노, 탐식, 인색, 태만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몸이 아플 때 병원에 가면 문진표(問診表)로 몸의 건강상태를 체크하듯이, 우리 영혼의 건강상태를 체크하는 영적 문진표와도 같습니다. 교회는 이를 통해서 우리 영혼이 타락하여 한줌의 재와 같은 파멸로 떨어지지 않게 방지하고자 합니다.

이제 사순절이 시작하는 첫날, 우리는 성지가지 재를 우리 이마에 바르면서 우리가 2000년 전, 이스라엘 사람처럼 얼마나 쉽게 돌변하여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존재들인지 인식하고, 그렇지만 이렇게 조변석개(朝變夕改)하며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지만 영원하신 하느님의 정신을 물려받은 우리 영혼이 죽음에 이르는 7가지 대죄에 떨어져서 그 영혼마저 한줌의 재가 되지 않도록 자신을 성찰하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영원성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영혼이 불에 타 없어지는 물질적 나무에서 영원한 생명을 향한 푸르른 영적 나무가 되도록 기도하며 노력합시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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