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권위에 대한 신학적 성찰(나해 연중10주일)
작성일 : 2024-06-08       클릭 : 99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40609 나해 연중10주일

사무상 8:4-11, 16-20 / 2고린 4:13-5:1 / 마르 3:20-35

 

권위에 대한 신학적 성찰

 

현대인들에게 권위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어떠한 조직이든지 그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지속적인 유지와 원활한 운영을 위해선 권위(authority)가 필요합니다. 권위는 보통 합법적으로 부여되며, 사람들은 그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권위자의 지시와 결정을 자발적으로 수용합니다. 그런데 권위는 종종 권위주의(authoritarianism)로 흐를 위험성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권위를 부여받은 자는 그 힘을 남용하여 구성원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독재적인 통제를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신뢰에 기반한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오늘 제1독서 사무엘 예언서를 통해 우리는 이러한 위험성에 대한 경고를 생각하게 됩니다. 예언서를 보면,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사무엘 예언자에게 와서 “다른 모든 나라처럼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해주십시오(사무상 8:5)라고 요구합니다. 이에 사무엘 예언자는 이웃나라처럼 왕정체제를 선택할 경우에 발생할 문제점들을 설명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다음과 말하며 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왕을 모셔야겠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다스려줄 왕,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를 이끌고 나가 싸워줄 왕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무상 8:19-20)

사무엘 예언서에 나타난 이러한 대립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는 당시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이 모세의 영도로 이집트를 탈출하고 40년 광야생활을 거쳐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선조인 야곱의 12아들로부터 기원한 12부족으로 형성된 일종의 연맹체 형태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주변 민족들의 정치형태와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주변국가들은 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정치체계인 반면에, 이스라엘은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각 지역에 퍼진 12지파들의 동등한 평등권에 기반한 철저한 지방자치 정치체제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중앙 집권적인 왕정체제가 나을지, 아니면 예언자 혹은 판관과 같은 정신적 구심으로 하는 평등성에 기반한 지역들의 연합체가 좋은지, 당시 이스라엘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던 것입니다. 또한 지리적으로 볼 때, 상대적으로 비옥한 지역인 이스라엘 북부는 중앙에서 왕이 간섭하는 것보다는 지역들의 동등한 연합체를 선호한 반면, 예루살렘을 포함한 남부지역은 척박한 자연환경으로 인해서 이를 타개할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이민족이 침입해 올 경우, 이에 맞서 싸울 강력한 왕을 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만일 백성들이 이웃국가들처럼 왕정을 선택할 경우, 사무엘 예언자는 왕이라는 권위가 권위주의로 쉽게 변질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려는 역사가 증명하듯, 다윗왕과 같은 훌륭한 왕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이후 권위주의 왕들의 출현으로 인해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되는 혼란속에 결국 멸망이라는 비극으로 끝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흥망성쇠 역사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참다운 권위를 지닌 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그 권위는 바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해서 노예로 빠뜨리는 마귀의 사슬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주시고, 하느님 안에서 참다운 형제자매 관계가 되는 공동체를 재건하십니다. 이것은 권위주의로 변질된 세상의 권위와 차원이 다른 권위입니다. 그 권위는 바로 겸손(humility)한 권위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이 하셨던 그 겸손한 권위를 추종합니다. 우리 전례에서 이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성 목요일에 하는 세족례(洗足禮)’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요한13:1)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써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해 주셨(요한13:1)다는 그 겸손한 권위를 발을 씻어 주심으로 보여주셨고, 교회는 이를 재현함으로써 그리스도교가 추구하는 권위가 어떤 것인지 증거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권위만이 이 세상을 온전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러한 겸손한 권위를 실천하실 때, 주변의 반응은 늘 긍정적이지만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친지들은 그 분을 미쳤다고 하고, 율법학자들은 마귀두목의 힘을 빌어 행한다고 비난했습니다. 또한 어머니와 형제분들이 예수님의 상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하고 반문하시고 ……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마르3:33-35)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반대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가까운 친지들로부터도 이해 받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엔 예수님의 말과 행동은 참으로 근본적(radical)이고 혁명적(revolutionary)이었던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정치와 관련해서 사람들은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라는 말을 인용하곤 합니다. 정치역사를 보면, 이 말은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반드시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특별히, 부패는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다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보수가 되었든, 진보가 되었든 몰락하게 되는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어쩌면 개인 혹은 집단이 갖고 있는 이기심이 아닐까 합니다. 그 이기심이 물질적으로 탐닉하면 부패로 나타나고, 정신적으로 집착하게 되면 파당으로 분열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부패 든, 분열이든 결국 그 밑바닥에는 에고(ego)라는 나 중심주의가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에고이즘(egoism) 때문에 율법학자들은 악령을 쫓으시는 예수님을 향해 악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고 하는 앞뒤가 맞지 않는 비방을 했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장로들은 사무엘 예언자가 왕정의 위험성을 알려줘도 자신들의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한 나라가 갈라져 싸우면, 그 나라는 제대로 설 수 없다(마르3:24)라고 면박을 당하고, 이스라엘은 소원대로 왕국이 되기는 했지만, 못된 왕들의 학정에 시달리다가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를 믿고 희망하는 우리 신앙인은 나 중심주의에 기반한 잘못된 판단, 오해, 비난 그리고 그로 인한 분열을 자아내는 외적인간을 벗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2고린 5:1)에 들어갈 내적인간으로 변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것을 회심(回心)이라고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나의 판단기준이 나 중심이 아닌 진리이신 하느님 중심으로 전환됩니다. 그리고 그럴 때 권위는 권위주의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에 근거한 권위는 권위주의라는 유혹에 빠질 위험이 있지만, 하느님에 근거한 권위는 예수님의 겸손함을 닮아 올바르고 진실하고 나와 모두를 살리는 권위로 지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각자와 우리 교회 그리고 우리 사회가 권위주의라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예수님이 모범으로 보여주신 겸손에 기반한 권위가 실현되는 곳이 될 수 있도록 간구하며 노력해 나갑시다.

권위의 원천이시며, 우리에게 참된 권위를 주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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