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240707 축적된 체험으로서의 인생(맥추감사주일)
작성일 : 2024-07-07       클릭 : 59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40707 맥추감사주일
신명 8:1-4 / 2고린 12:2-10 / 마태 6:25-34

축적된 체험으로서의 인생

안녕하십니까? 새로 부임한 이경래 베드로 신부입니다. 2024년 전반부가 지나고 후반부로 들어서는 첫 주일인 맥추감사주일에 15년 전 보좌사제 신분으로 시무했던 이 교회에 관할사제로 다시 오게 되어 여러분과 함께 주일 감사성찬례를 집전하게 되어서 참으로 뜻깊고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의 낯익은 얼굴을 보니 반갑기도 하면서도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어서 한편으론 마음이 약간 짠합니다. 40대 초반에 여러분을 만났고, 돌고 돌아서 이제 50대 후반이 되어 다시 만나면서, 우리 각자가 15년간 지내온 세월의 체험들이 어떠했을까 느껴봅니다. 그동안 아이들은 자라서 어른이 되었고, 우리 중 어떤 분들은 은퇴를 해서 노년의 시기에 들어선 분들도 계십니다. 그리고 예전에 봤던 분들 중에는 인생의 수확을 이루고 이제 하늘나라에 계신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마치 추수하는 날을 위해 논밭에 씨를 뿌리고, 가꾸고, 수확하는 농부와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보리와 밀을 추수하고 감사드리는 맥추(麥秋)감사주일을 맞아 저는 사도 바울의 인생농사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아시다시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합니다. 교회는 매년 1월25일을 ‘사도 성 바울로의 회심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 체험은 교회역사에 있어서 실로 엄청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12사도들과 달리 그리스문화와 히브리문화를 모두 접했을 뿐만, 율법교육을 체계적으로 배운 열정에 찬 젊은이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삶의 방향이 180도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갈릴리 변방사람들끼리 믿는 종교에서 유다를 넘어서 온 로마제국의 종교로 전파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이 다마스커스에서 회심한 후,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완벽하게 수행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들을 죽이려고 기를 쓰던 자가 어느 날 회심했다고 열정적으로 예수를 전하자, 신자들은 의심하며 부담스러워하였고, 유대인들은 그를 배신자라고 하면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9장 28절부터 31절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때부터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며 자유로이 돌아다니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대담하게 전도하며 그리스 말을 하는 유다인들과 이야기도 하고 토론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것을 안 교우들은 사울을 가이사리아로 데리고 내려가 거기에서 다시 다르소로 보냈다.” 이 중 마지막 구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루가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혼란과 소요를 일으키던 바울이란 인물을 쫓아버렸기 때문에 교회는 안정을 얻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의 지나친 열정이 결과적으로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간의 갈등을 부채질했고, 이제 막 탄생한 초대교회에 큰 부담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고향 다르소로 돌아갔고 거기서 다시 예루살렘에 방문하기까지 약 14년간 고독과 침묵과 불안 속에서 지냈습니다. 14년이 흘러서 좀 더 원숙해진 바울은 바르나바와 함께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지중해 일대에 교회를 세웁니다. 그리고 다시 14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오늘 제2독서 고린토교회에 보낸 둘째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그 동안 겪은 또다른 신비체험을 간증합니다. 다시 말해, 다마스커스의 체험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열정에 불을 붙였다면, 오늘 독서에서 들은 신비체험은 28년 동안 살아온 다양한 삶의 굴곡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앙을 더욱 초월적이고 원숙하게 하였습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이런 체험은 비단 사도 바울한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구약시대 모세도 이집트 왕자시절 괴롭힘 당하고 있는 동족을 도와주었지만, 오히려 그들로부터 버림받아 광야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 예언자도 거짓 예언자들을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아 사막으로 피신하여 무서운 고독 가운데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신앙의 위기도 위기지만, 현실적으로 더 절박했던 것은 오늘 복음말씀인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마태 6:31)”하는 생존의 위기가 아니었을까요? 
바울은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이 어려운 때를 지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들이야말로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성서와 교회역사의 그 어떤 인물도 이 내적 고뇌에서 제외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기간 사람들은 이 고통으로 속속들이 젖어 들어 마음의 아픔으로 시달리거나 깊은 숙고의 때를 찾게 됩니다. 이 절망스러운 고통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고, 왜 이렇게 무거울까?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 사람들은 절망의 깊은 장막 틈새를 비집고 비쳐오는 가냘픈 빛줄기를 발견합니다. 영혼 안에 어떤 빛이 비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이 고통스러운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이 주인이시고, 그 주인은 당신의 일꾼을 자신의 성공과 이익이란 좁은 영역에서 해방시켜 주시어, 이 세상의 참 주인이 뜻하시는 것에 자유롭게 응하고 쓸 수 있는 훌륭한 도구가 되게 해 주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과거 자신의 힘으로만 하는 듯한 착각 속에서 대단한 열의로 시작했던 활동을 이제 새로운 양식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계획에 의하여 모든 것을 정화시키는 불을 통과하여 원숙한 주님의 제자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경험과 체험을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회개하고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새로 태어났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우리는 성령의 열정으로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예수님을 열심히 전하기도 하고, 교회 일에 열정적으로 헌신합니다. 그러다가 때때로 이 열정이 애착이 될 때도 있고, 그래서 상처도 받게 되고, 급기야 회개하고 믿었던 것에 대한 시련을 겪게 됩니다.
그럴 때 오늘 제2독서에서 들었던 사도 바울의 두번째 회심체험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 체험은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는 마치 무균실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선 우리는 아무 상처도 입지 않은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로운 계획에 눈을 떠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럴 때 주님의 제자 직분을 수행하면서 겪는 크고 작은 어려움 안에서도 항상 자비와 구원의 은총을 주시는 주님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맥추감사주일에 우리가 살아온 각자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사도 바울에게 주신 그 부르심의 은총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께서는 분명히 여러분이 걸어온 인생길에서 부르심의 순간, 정화의 기간에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나름 인생의 수확을 거둘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를 깨달을 때 우리의 인생은 더욱 무르익어갈 것입니다.
다시한번 도봉교회에서 여러분을 다시 만나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여기 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도봉교회 공동체를 통해 주님의 은총으로 풍요한 인생의 수확을 거둘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를 추수할 일꾼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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