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정심과 정언(나해 연중19주일)
작성일 : 2024-08-11       클릭 : 41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0240811 나해 연중19주일

사무하18:5-9, 15, 31-19:1 / 에페 4:25-5:2 / 요한 6:35, 41-51

 

정심(正心)과 정언(正言)

 

신학교에서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 신학생들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것은 오래된 서양의 사제 양성 전통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여러 가지 기독교 신비를 설득력 있게 입증하기 위해서 철학이라는 이성적 도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바탕 위에 신학을 공부해야만 기독교 신앙이 독단적이고 광신적으로 빠질 위험을 막아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서양의 중요한 신학 이론은 철학이라는 양분 위에 자신의 건물을 세웠습니다. 대표적으로 성 어거스틴의 신학은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았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현대 신학의 거장 중 한 분인 칼 라너(Karl Rhaner)신부님의 신학도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라는 현대 독일 철학자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틴 하이데거는 유년 시절 사제가 되기 위해 예수회 수도회에서 수도 생활을 하다가 몸이 약해서 포기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런 배경이 있어서인지, 그가 쓴 철학책을 읽고 있으면 마치 철학이란 논리로 써 내려간 한 편의 신학적 성찰을 읽는 느낌입니다. 예컨대, 하이데거는 모든 존재의 궁극적 근거를 ‘존재(Sein)’라고 칭했는데 이것을 신학 용어로 번역하면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 안에 살아가는 존재를 하이데거는 ‘현존재(Dasein)’라고 했는데 이것은 인간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현존재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와 존재의 의미를 끊임없이 탐구해야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존재라는 근원에서 나온 현존재의 속성상 존재를 통해 비로소 의미를 부여받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것을 어떻게 알아 갈 수 있을까요? 하이데거는 그것을 ‘언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가 사용하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그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신앙적으로 풀이해 보면, 어떤 사람이 하느님에 대하여 말할 때, 그 말을 들어보면 그가 어느 정도로 하느님에 대하여 아는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울은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난 성도들이 준수해야 할 생활윤리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성도들이 지켜야 하는 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충고하십니다: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도록 하십시오. 마지막 날에 여러분을 해방하여 하느님의 백성으로 삼으실 것을 보증해 주신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여 드리지 마십시오. 모든 독설과 격정과 분노와 고함소리와 욕설 따위는 온갖 악의와 더불어 내어버리십시오(에페 4:29-31)”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을 하이데거가 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명제에 대입해 보면, 성도가 사용하는 언어의 수준과 성도의 인품이 일치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어떤 신자가 나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깊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처럼 남을 모함하고, 쉽게 화를 내고, 욕을 한다면 그가 말한 신앙의 집은 모래 위의 성에 불과할 것입니다.

말과 그 사람 됨됨이 간의 관계에 대해서 동양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동양의 지혜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안정된 사람은 그 말이 무겁고 조용하며, 안정되지 못한 사람은 그 말이 가볍고 빠르다.(心定者,其言重以舒,不定者,其辞轻以疾。)” 여기서 ‘중이서(重以舒)’란 말은 차분하여 격렬하지 않다는 것이고, ‘경이질(轻以疾)’이란 말은 경솔하고 심지어 격렬하기까지 한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말이란 마음의 창이고, 마음에서 잘 정리되지 않은 일은 말 속에서 여러 방식으로 드러나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의 말과 행동거지로 그의 수양 정도를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동양의 고전 《주역(周易)》에선 “말과 행동은 군자에게 가장 중요한 시작이다(言行,君子之枢机)”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어떤 분들은 “사람이 살다 보면 화가 날 때도 있고, 그래서 욕을 할 때도 있지, 어떻게 마냥 고상한 말만 할 수 있습니까?”하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겁니다. 이성(理性)뿐만 아니라 감정(感情)도 갖고 있는 인간이란 측면에서 볼 때, 이러한 반론은 나름 일리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은 어쩔 수 없어!”라고 자포자기 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을 다스리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나요?

동양의 고전 《대학(大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뜻이 정성스러워진 이후에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된 후에 몸이 닦인다(意诚而后心正,心正而后身修)” 다시 말해, 말을 다스리려면 먼저 마음을 다스려야 하고, 마음을 다스리려면 내가 믿고 바라는 근원적인 뜻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내가 믿고 바라는 근원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존재의 근거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본받아 여러분은 사랑의 생활을 하십시오(에페 5:2)”라고 권면하신 겁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설교 서두에 언급한 하이데거의 철학 용어를 빌려 설명하자면,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서 살고 있는 현존재인 우리에게 빵으로 상징되는 물질이 주는 만족은 유한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영원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당장 그 빵이 없으면 우리는 배고파서 힘들고 심지어 생명을 잃을 정도로 강력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것을 얻기 위해 뺏고 뺏기는 치열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인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마음이 온통 거기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유한한 한계를 초월한 근원적인 존재(Sein)인 하느님을 찾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안정되고, 그 안정된 마음에서 나오는 우리의 말도 차분해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존재의 근거를 알아보지 못한 채, 오직 현세의 가치가 전부라고 믿고 생활한다면, 우리는 그 욕망으로 인해 늘 목마를 것이며, 그런 불만족한 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경솔하고 격렬할 것입니다. 

우리는 매 주일 하느님의 성전에 모여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생명의 빵, 구원의 포도주를 마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먹고 마실 때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빵과 포도주를 통해 그 너머에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과 일치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깊이 믿고 희망할 때, 우리의 마음은 신실해 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그 거룩한 사랑을 본받아 나의 말과 행동이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를 사는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사랑으로 정화되고 밝게 된 우리 모두가 바른 마음(正心)과 바른 언어(正言)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길 다짐하며, 우리를 위해 생명의 빵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덧글쓰기  

광고성 글이나, 허위사실 유포, 비방글은 사전 동의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이전글 베드로 24-08-11 43
다음글 베드로 24-08-03 47


묵상 영성 전례 옮긴글들
이경래 신부 칼럼 김영호 박사 칼럼

홀리로드 커뮤니티

댓글 열전

안녕하세요?선교사님!
정읍시북부노인복지관 멸치 판매..
원주 나눔의집 설명절 선물세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