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법과 빵의 근거(나해 연중20주일)
작성일 : 2024-08-17       클릭 : 70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0240818 나해 연중20주일

열왕상 2:10, 3:3-14 / 에페 5:15-20 / 요한 6:51-58

 

법과 빵의 근거

 

우리는 그리스 아테네를 서구 민주주의의 발상지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대 민주주의의 발상지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다들 잘 모를 것입니다. 그렇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세계사를 배울 때, ‘대헌장(Magna Carta)’이라는 말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저는 학창 시절 당시 역사 선생님이 마그나 카르타는 근대 민주주의의 문을 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가르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800년 전, 잉글랜드의 존(John)왕은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기 위해 과도한 세금과 병역을 부과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불복하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러한 폭정에 영주들은 마침내 항거하였고, 그 결과 1215년 6월 15일 런던 근교에 있는 러니미드(Runnymede) 목초지에서 존 왕은 영주들에게 굴복하여 그들이 요구한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지금도 그곳의 표지판에는 "근대민주주의의 발상지(The Birthplace of Modern Democracy)"라는 문구가 적혀있습니다. 이곳은 프랑스, 미국의 국회의원들도 방문해서 그 정신을 기릴 정도로 서구 근대민주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곳임과 동시에 오늘날 전 세계 민주주의 정신의 발상지로 기념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영국의 러니미드에서 서명한 마그나 카르타를 왜 근대민주주의의 이정표라고 하는 걸까요? 그것은 서구역사상 최초로 ‘왕은 법의 지배를 받는다’라는 법치주의 정신을 명문화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국가의 최고 권력자인 왕이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사람의 신체와 재산권을 제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법의 절차에 따라 진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법의 근거는 단지 몇몇 사람들끼리 만든 인공적인 장치라기 보다는 근원적으로 하느님 법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것은 아시는 바와 같이 서구 정신이 그리스 문명뿐만 아니라 히브리 문명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인간의 법이 하느님 법에 근거할 때만이 참 생명을 지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1독서에서 다윗왕에 이어 왕이 된 솔로몬에게 하느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이 내 길을 따라 살았듯이 내 길을 따라 살아 내 법도와 내 계명을 지킨다면 네 수명도 길게 해주리라.(열왕 상 3:14) 사실, 솔로몬이 왕국의 최고 권력인 왕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의 자리를 위협하는 반대 세력으로 인해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아무리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왕이었지만, 그렇다고 기분내키는 대로 일을 처리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솔로몬왕은 하느님께 명석한 머리를 주시어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수 있고 흑백을 잘 가려낼 수 있게 해주십시오(열왕 상 3:9)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솔로몬은 국가를 통치하는 것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법과 계명에 근거하여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느님이 주시는 법과 계명을 잘 판단하고 집행할 수 있는 지혜를 청했습니다. 그는 가히 통치자로서 갖추어야 할 자세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은 이러한 솔로몬의 겸손한 모습을 보시고, 그가 청하는 것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축복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단지 솔로몬 개인의 축복만이 아니라 왕국의 축복으로까지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제1독서가 인간사회를 지속시키기 위해 필요한 법과 제도에 대하여 말한 것이라면, 복음은 사회구성원들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물질, 특별히 빵으로 상징되는 먹을거리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단어를 가지고 예수님과 사람들이 이해하고 바라보는 관점이 맞질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요한 6:53-54)”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52)”라고 따집니다. 왜 이러한 불일치, 몰이해가 일어났을까요? 예수님은 양식과 음료, 심지어 살과 피라는 육신도 그 근원은 창조주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이지 그것이 어떻게 하느님과 연관되어 있는지 그 신비를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삼라만상이 그 존재의 근거인 하느님에게서 나왔고, 그래서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물질적 충족만이 인생의 전부라고 여기는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다 유기적인 것으로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물질적인 것 따로 영적인 것 따로 생각하는 사람들 간에는 근원적인 틈이 놓여 있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기쁜 소식, 즉 복음의 핵심은 하늘에 있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입니다. 여기서 하늘나라라는 말은 신약성경 원어로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라고 하는데, 그 뜻은 왕국, 다스림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물리적 의미로서의 하늘(sky)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이 가까이 왔다’ 혹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선포는 하느님의 법에 따른 통치가 가까이 왔다는 뜻이요, 이 나라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단지 배만 부르면 되는 그런 물질적 차원을 포함한 전인적인(holistic)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것은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무언가를 듣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나라와 하느님의 법, 예수님이 말씀하신 살과 피를 단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세라는 삶의 자리로만 제한해 버린다면, 이 땅에서 전할 복음의 맥락을 벗어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울은 에페소 교회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깊이 생각해서 미련한 자처럼 살지 말고 지혜롭게 사십시오.(에페 5:15)” 사도 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생명의 빵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전에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였고, 눈에 보이는 세상의 법과 율법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겪고 또한 성령의 임재로 이 신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스승 예수께서 ‘하늘에서 온다’고 하신 말씀이 단순히 물리적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을 창조하시고 지탱시켜 주시는 영원하신 하느님 친히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이 우리와 똑같이 인생의 쓰디쓴 고난의 길을 걸으셨고, 마침내 비참한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다시 영원한 하느님 나라로 가신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목격한 그들은 더 이상 고해(苦海) 같은 인생길에서 사라져 없어지지 않고, 성령의 도움으로 예수께서 가신 길을 갈 수 있고, 마침내 영원히 살아있는 생명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믿고 소망하게 것입니다. 

설교 서두에서 마그나 카르타가 선언된 런던 근교 러니미드 목초지가 근대 민주주의의 발상지라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해서 민주주의 정신을 기념하듯이, 우리가 매 주일 모이는 이 성전에서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참다운 말씀과 법을 듣고, 빵과 포도주를 영하면서 우리자신이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영원한 나라에 참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기쁨과 희망과 감사의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법과 음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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