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에파타! (나해 연중23주일)
작성일 : 2024-09-07       클릭 : 55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0240908 나해 연중23주일

잠언 22:1-2, 8-9, 22-23 / 야고 2:1-17 / 마르 7:24-37 

 

에파타! 

 

중국의 고대 역사서인 《십팔사략(十八史略)》에는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그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을 관찰하고, 부유하다면 그가 베푸는 것을 관찰하고, 벼슬이 높다면 그가 채용하는 사람을 관찰하고, 곤궁하다면 그가 하지 않는 것을 관찰하고, 가난하다면 그가 취하지 않는 것을 관찰한다.(居视其所亲,富视其所与,远视其所举,穷视其所不为,贫视其所不取) 이 말은 평소에 그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과 가능성을 추측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부유할 때 그가 베푸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도량을 알 수 있으며,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채용하는 사람을 보면 그의 가치관을 알 수 있고, 가난하고 힘들 때 그가 흔들림 없이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굳은 심지를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와 제2독서는 신앙인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중 제1독서 잠언은 하느님을 믿는 관리가 공적인 일을 할 때, 해서는 안되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힘없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을 털지 말며 법정에서 어려운 사람을 짓누르지 마라. 야훼께서 그들의 송사를 떠맡으시고 어려운 사람 등치는 자를 목조르신다. (잠언 22:22-23)” 이와 같은 맥락에서 야고보서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에서 해서는 안될 행동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하지 마십시오. …… 여러분이 성경 말씀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최고의 법을 지킨다면 잘 하는 일이지만 차별을 두고 사람을 대우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고 여러분은 계명을 어기는 사람으로 판정됩니다.(야고 2:1, 8-9)”

이처럼 오늘 독서인 구약과 신약 모두 우리에게 사람을 차별대우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에 대하여 그것은 정의롭지 못한 행동이라고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실제로 현실사회는 이러한 현상이 자주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모순이 생기는 걸까요? 그리고 이 현상의 이면에는 어떤 원인이 있는 걸까요? 저는 그 배후에 ‘편애(偏愛)’라는 감정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편애(favoritism)라는 감정은 상대적인 심리상태로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게 평가하거나 대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성(理性)과 도덕관념으로 볼 때,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편애라는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걸까요?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첫번째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과 비슷한 사람에게 더 호감을 가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경향이 더 해지면 집단적 소속감으로까지 발전되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혈연, 지연, 학연 등을 비롯해서 계층의식, 인종주의 등도 이에 해당됩니다. 두번째 이유는 자기에게 돌아올지도 모를 어떤 이익과 보상에 대한 기대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야고보서 저자가 다음과 같이 언급한 예가 그 대표적입니다: 가령 여러분의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고 합시다. 그 때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며 여기 윗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거기 서 있든지 밑바닥에 앉든지 하시오 하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불순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여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야고 2:2-4)”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편애는 발생합니다. 그리고 편애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차별 대우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이는 관계의 불화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성서는 이것을 단지 인간들끼리의 관계로만 국한시키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과의 관계로까지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의 신분, 나이, 인종, 경제적 여건이 어떻든지 간에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형상(image of God)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내 이웃을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은 하느님을 소외시키는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띠로, 시돈, 데카 폴리스 등 이방지역뿐만 아니라 갈릴리 호수를 지나 유다인 지방을 넘나들며 종횡무진으로 활동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당시 유다인들과 이방민족 간에 상호차별하는 편견과 편애에 구속받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지역과 갈릴리 유대지역에서 일어난 두 가지 치유기적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기적 이야기는 각각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띠로라는 이방지역에서 만난 시로페니키아 출신 이방여인과 예수님과의 만남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여인은 병에 걸린 딸을 낫게 하기 위하여 예수께 적극적으로 매달립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7:27)”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여인은 “상 밑에 있는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 먹지 않습니까?(마르 7:28)”라고 재치 있게 응수합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옳은 말이다. … 마귀는 이미 네 딸에게서 떠나갔다(마르7:29)”라고 하시며 여인의 딸을 고쳐주십니다. 이처럼 이방지역에서 일어난 치유 이야기는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은 믿음이 없고 그래서 신앙의 지혜도 부족한 자들이라는 편견을 깨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갈릴리 호수를 건너 유대인들이 사는 지역에서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친 이야기는 시로 페니키아 여인 이야기와는 달리 이야기의 초점이 예수님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여기서 벙어리(dumbness)란 음성언어를 소리낼 수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공동번역성서에는 이 사람을 귀먹은 반벙어리라고 번역했는데 한자어로 농아(聾啞)라고도 합니다. 농아는 귀가 먹어 귀로 듣지 못하기 때문에 언어를 익히지 못해 말을 할 수 없게 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예수께 데려와 치유를 청하는 귀먹은 반벙어리는 듣지 못하기 때문에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이 사람의 치유 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께서는 손가락을 그 사람의 귀속에 넣으십니다. 그런 다음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십니다. 이것은 듣는 것이 말하는 것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그런 다음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쉽니다. 공동 번역에선 ‘한숨을 내쉰다’라고 했지만, 원래 뜻은 ‘신음소리를 내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 사람의 고통을 당신의 고통으로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 고통을 단지 공감하신 것에만 그치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보시는 행동을 통해 성부 하느님께 그 고통을 전하시면서 이제 하늘과 인간 간에 막힌 것을 뚫으십니다. 그 뚦음이 바로 “에파타!” 즉, ‘열려라’라는 외침으로 이루어집니다. 복음서 저자는 귀먹은 반벙어리의 귀와 입을 여신 예수님을 보면서 이것은 단지 그 한 사람만의 일만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복음에 귀와 입이 닫힌 당시 유대인 모두가 열려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 여인과 유대인 농아의 이야기를 대조함으로써 당시 사람들의 차별의식과 편애라는 막힘을 여시고 모든 이에게 열린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이 선포하시는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보여주십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 세상은 여러 가지 편견과 편애로 인해 서로 내 편 네 편으로 가르고, 차별하고, 미워하고 심지어 테러와 전쟁으로 생명을 앗아가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 고통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때론 시로 페니키아 여인처럼 주님께 매달리기도 하고, 때론 귀먹은 벙어리처럼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채로 타들어 가는 내 영혼을 어떻게 하소연하지도 못한 채 답답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에파타!”하고 외치시며 우리를 옥죄고 있는 닫힌 문을 열고 나오라고 부르십니다. 

우리가 이 문을 열고 나올 때, 우리는 야고보서 저자가 우려했던 차별하는 교회공동체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양의 고전에서도 언급한 올바른 됨됨이를 겸비한 인간으로써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현상을 바로 잡을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의 닫힌 귀와 입을 열어주시는 에파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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