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240922 위로부터 오는 지혜(나해 연중 제25주일)
작성일 : 2024-09-22       클릭 : 48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0240922 나해 연중 제25주일

잠언 31:10-31 / 야고 3:13-4:3, 7-8상 / 마르 9:30-37

 

위로부터 오는 지혜

 

철학(哲學)을 영어로 philosophy라고 합니다. 이 말은 ‘사랑하다’, ‘좋아하다’라는 philo와 ‘지혜’라는 sophia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즉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이며,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입니다. 서양사상의 양대 산맥인 그리스 사상이나 히브리 사상 모두 지혜(sophia)를 여성으로 의인화하고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소피아 여신은 천상의 지혜를 지상의 인간에게 전달한다는 올빼미를 팔에 올리고, 명예의 상징인 월계관을 머리에 두르고 있습니다. 또한 히브리 사상에서 지혜는 오늘 우리가 들은 제1독서 잠언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어질고 지혜로운 아내이자 어머니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혜를 여성으로 의인화하는 배경은 고대 농경사회에서 여성들이 집안의 각종 대소사를 맡다 보니 아무래도 일상생활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고려할 것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삶의 지혜가 전투나 사냥하던 남성들보다 더 풍부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후에 그리스도교는 지혜를 삼위일체 하느님 중,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을 당신의 삶으로 몸소 실천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들은 제2독서 야고보서는 우리에게 두 종류의 지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땅의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의 지혜입니다. 땅의 지혜는 고약한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이 그 안에 있는 반면, 하늘의 지혜는 순수하고, 평화로우며, 점잖고, 편견과 위선이 없어서 자비와 착한 결실로 충만합니다. 한 걸음 더들어가 야고보서는 사람들 간에 분쟁을 일어나는 내적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욕심을 내다가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남을 시기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싸우고 분쟁을 일으킵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해도 얻지 못하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2-3)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야고보서가 말한 땅의 지혜를 가진 사람들의 모습이 어떤 건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다가 사람들에게 잡혀서 죽임을 당하시지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묻기조차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그러면 자신들도 실패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이 일어났었지만, 예수께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어쩌면 평소 예수님이 5,000명도 먹이고, 사람들도 낫게 하고, 물 위를 걷는 기적을 행하신 것처럼 예루살렘의 지배자들과 싸워서 절대 죽지 않으시는 초인과 같은 기적을 행하실 거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실패할지도 모른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반드시 승리할 거야”라는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일단 그들은 패배자 예수님이 아닌 승리자 예수님 쪽으로 배팅(!)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지배자들과 한판 대결을 겨루고 이기신 후, 누가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를 놓고 벌써부터 논공행상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지지고 볶고 싸웠든지 모르겠지만, 스승 예수께서는 그들을 당신 옆에 앉히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리고 오셔서 안으신 다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또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곧 나를 보내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 이처럼 스승 예수께서 간곡히 권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도 다 아시는 것처럼, 제자들은 변하지 않았고, 결국 유다는 스승을 팔아넘겼고, 베드로는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했고, 나머지 제자들은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받는 것도 결국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신 하늘의 지혜가 아닌 여전히 완고하게 우리 마음에 박혀있는 땅의 지혜에 결박당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면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받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할까요? 크게 두 가지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마음을 비우는 수행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랑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먼저, 마음을 비우는 지혜입니다. 저에게 인생의 통찰을 준 책 중에서 『장자(莊子)』라는 고전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시남자(市南子)라는 사람이 노나라 임금에게 <빈 배(虛舟)>라는 이야기로 나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가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소개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성질 급한 사람이 배를 저어 강을 건너는데 어떤 배가 떠내려오다가 그 배에 부딪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빈 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떠내려오던 또 다른 배와 부딪히자, 그는 소리치며 당장 비켜 가지 못하느냐고 합니다. 한번 소리치고, 다시 소리치고, 결국 세 번째는 욕설을 뱉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사람이 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화를 내지 않다가 지금 와서 화를 내는 것은 처음에는 배가 비어 있었고, 지금은 배가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요?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능히 그를 해하겠습니까?

장자의 <빈 배>이야기에 나온 사람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저마다 잔뜩 자신의 야망을 가득 채우고 서로 비키라고 싸우니 하느님의 배가 제대로 갔겠습니까? 결국 십자가사건 앞에서 난파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라는 배도 자신을 비우고 그 안에 주님을 모시지 않는다면 하느님 나라를 향해 제대로 갈까요? 결국,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행해야 하는 일은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초에 하느님이 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셨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뭔가를 움켜쥐고 있으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거나 창조할 수 없습니다. 비움이 곧 채움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꼭 필요한 삶의 지혜입니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현명하고 어진 여인이 부지런히 집안 식구들을 돌보는데 그 내적 원동력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이 어린이와 같은 약한 자를 받아들이라고 하시는데 그럴 수 있는 내적 힘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현명하고 어진 여인이 남편을 사랑하고 자녀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런 부지런함과 그 속에서 현명한 지혜가 나올 수 있었을까요? 또한 이기심을 비우고 예수님처럼 사랑의 마음을 닮지 않는다면 연약한 자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 사람들은 사랑을 지극히 편협하고 특정한 측면만 말하고 있지만 사실, 사랑의 범위는 무궁무진합니다. 사랑을 달리 표현하면 ‘매력’입니다. 그 매력에 이끌리고, 또한 매력으로 끌어당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구가 중력으로 서로를 당기는 매력이 없다면 이 지구상의 모든 사물과 생물은 아마도 우주 밖으로 다 튕겨 나가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주의 별이 서로를 당기는 매력이 없다면 이 우주의 별들은 엄청난 혼란 속에 파멸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서로에 대한 매력이 없다면 인간이란 종이 이 지상에서 지속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우주와 온갖 생물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 매력을 느끼시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사랑이 없다면 우주는, 세상은, 그리고 우리는 종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인간적이며, 우주적이며, 신적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닮은 우리와 모든 사물 안에 잠재되어 있는 ‘거룩한 본성’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 거룩한 사랑의 본성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필립비서 2장 1절부터 11절에 의하면,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당신의 것을 다 내려놓으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신약성서에서는 이 구절을 케노시스(Kenosis), 즉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을 가장 잘 묘사한 찬미시(讚美詩)라고 합니다. 앞에서 제가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얻기 위해선 ‘비움’과 ‘사랑’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이 두 가지를 통합적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케노시스의 그리스도, 즉 예수님의 자기 비움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크리스천이라고 하듯이 우리가 본받고 따라야 할 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내 욕심에서 나오는 어리석은 지혜를 벗어나 점차 자기를 비우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하늘의 지혜를 갖춘 사람으로 변모해 갑니다. 우리 각자가 이렇게 변할 때, 우리 교회 역시 케노시스의 배, 자기 비움의 배가 돼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 즐겁고 행복하게 항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해 우리 각자와 우리 교회가 하늘의 지혜를 얻게 해 달라고 간구합시다. 하느님은 이러한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기쁜 마음으로 당신의 지혜를 우리에게 내려주실 것입니다. 

참이시며 선하시고 아름다운 지혜의 근원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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