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7 나해 연중30주일
욥기 42:1-6, 10-17 / 히브 7:23-28 / 마르 10:46-52
“보라, 대사제를(Ecce Sacerdos magnus)”
오늘 제2독서 히브리서는 참다운 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른 대사제들은 날마다 먼저 자기들의 죄를 용서받으려고 희생제물을
드리고 그 다음으로 백성들을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날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속죄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이 일을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 (히브7:27)”
우리가 매 주일 드리는 감사성찬례에서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기 직전에 드리는 경문은 방금 언급한
히브리서의 이러한 사상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그 예문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단 한 번 온전한 희생 제물로 드리셨나이다. (감사기도 1양식 중에서)”
이처럼 성경말씀과 성찬례 예식문에서 보듯이, 희생제물과
사제는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둘 간의 관계는 전통적으로 기독교 용어를 표기하는 라틴어
단어에서 잘 드러납니다. 즉, 희생 혹은 희생제물을 라틴어로 sacrificium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거룩한 것을 행하다’, 혹은 ‘거룩한 것을 만들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제는 sacerdos라고 하는데, 이것은 ‘거룩한 것을 행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제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거룩한 예물, 즉 희생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동물이 되었든 아니면 식물이 되었든 심지어 다른 사람이 되었든 희생물을 필요로 하는 반면,
예수님은 타자(他者)를 희생시키지 않고, 스스로가 제사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가 거룩해지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을 ‘참다운
대사제’라고 부릅니다.
대사제! 저는 이 단어를 말할 때마다 아주 오래전 20대 초반에 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그것은 사제 서품 예식입니다. 지금은 성소자가 많이 줄어서 그렇게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1980년대만
하더라도 신학생이 많아서 선배들 서품식때 성가는 후배 특별히 학부생들이 불렀습니다. 까만 양복을 입은
어린 신학생들은 명동성당 2층 파이프 오르간이 있는 성가대석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종이 울리고 입당행렬이 시작되면 장엄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울리고, 향
연기를 내면서 십자가가 들어오고, 이어서 그날 서품을 받을 수품자(受品者)들이 흰색 장백의에 왼쪽 팔에는 그날 입을 흰색 제의를 걸치고 기도 손을 하면서 들어오고, 그 뒤를 이어서 사제단의 행렬이 이어지면 우리들은 <보라, 대사제를>이란 노래를 라틴어로 힘차게 부릅니다.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여기 일생동안 하느님 뜻에 맞고 의롭다고
판명된 대사제를 보아라(Ecce sacerdos magnus qui in diebus suis placuit
Deo et inventus est justus, et inventus est Justus)” 2층 성가대석에서 순행행렬을 내려다보면서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와 젊은 남성들의 우렁찬 노래소리를 들으면, 그 거룩함과 장엄함에 전율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리고 스승 예수님을 본받아 10년동안 갈고
닦은 선배들의 모습이 그렇게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10년
후, 저 행렬을 걸어가는 저의 모습을 상상해 봤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저의 바람과 달리 10년하고도 10년을 더한 20년이란 세월을 이곳저곳을 통해서 훈련시키셨고, 명동성당이 아닌
정동 대성당 제단 앞에 엎드리게 하셨습니다. 고딕성당에서 염원한 것을 로마네스크 성당에서 이루어 주셨습니다. 2008년 서품식 때, 사제서품자들이 제법 많아서 엎드릴 공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제대를 치우고 신자석에서 볼 때 예수님 모자이크 성화가 있는 저 안쪽 벽에 있는
제대에서 옛날 방식으로 벽을 향해 중앙에 주교님을 중심으로 막 사제로 축성된 새 사제들이 성찬례를 거행했습니다.
그때 받은 느낌은 신자석 앞에 있는 붉은 카페트에서 엎드려 기도하고 안수로 축성된 후, 예수님이
계신 깊숙한 벽면제대로 걸어 들어갈 때, 저는 마치 하느님이 계신 그 신비한 공간 속으로 들어가서 봉헌하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후로 오늘과 같이 신자들과 마주 보고 성찬례를 거행하지만, 저는
가끔씩 서품식 때 벽제대에서 했던 그 성찬례의 느낌이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 후, 제가 강화성당 관할사제로 파송 받아 한옥성당에서 감사성찬례를 드릴 때 다시한번 하느님께 희생제사를 봉헌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날이 화창한 날 아침,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고 그것을 높이 들어 올릴 때, 창을 통해 들어오는
아침햇살이 비치면서 주님의 현존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보잘껏 없는 저를 주님의
사제로 불러 주시고, 당신이 제정하신 이 희생제사를 집전할 영광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을 보면,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 바르티메오라는
소경을 고쳐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했기에 그저 소리로써 대사제이신 예수님이 지나가는
것을 알뿐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고 사람들에게 그를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처음에는 시끄러우니 조용하라고 야단치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그 말씀에 그제서야 태도가 돌변해서 “용기를 내어 일어서라. 그분이
너를 부르신다”라고 격려합니다. 예수님과 바르티메오 사이에 가로놓인 인(人)의 장벽이 사라지자, 그는 벌떡 일어나 예수께 다가갑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그는 이리저리 말을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하고 말씀하시자, 그는 곧 눈을 뜨게 되었고 자신이 원래
하던 곳으로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는 우리 신앙인들의 신앙과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귀한 통찰을 줍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소경 바르티메오의 삶은 온전치 못한 인간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측면으로 설명하자면, 사람들은
눈과 귀 모두를 사용하는 통합적 인식이 아닌 그중 하나가 작동이 안된 채 부정확하고 답답한 상태로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직접 보지 못하고 풍문으로 듣거나, 아니면 보기는
하는데 무슨 소리인지 들리지 않는 그런 불완전한 진리로 살아갑니다. 이 미완성된 모습은 근본적으로 내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의 한쪽 측면밖에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이것은 온전하지 않으며,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하게 듣고, 제대로
보기 위해 치유를 원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 드리는 우리의
기도는 그 목적이 명확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 각자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시면 그 문제점을 알고 있는 나는 주님께 정확한 소원을 청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주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의 근원적인 문제점을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그 문제점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면, 설사 예수님이
고쳐 주셨다 해도 우리는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결국에는 주님이 주신 은총을 싸구려 물건 다루듯이 할지도 모릅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면, 주님이 “가라!”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그 가는 방향이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이 아닌 곳으로 갈 것이고, 결과적으로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되돌아가 버릴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대사제이신 예수님을 잘 보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타인의 희생에 기생해서 거룩해지는 희생제사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는 예수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소경 바르티메오와 같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르티메오에게 주신 그 은총을 나에게도 주시길 간구합니다. 그러면
대사제이신 주님의 희생이 주는 그 은총으로 우리는 온전해져서 주님이 “가라!”라고 선언하실 때, 우리는 온전한 사람이 되어 성전문을
나설 것이고, 주님의 사제로서 주님의 길을 힘차게 걸어갈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온전하게 치유해 주셔서, 당신의 사람으로 거룩하게 해 주시는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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