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08 다해 대림2주일 말라 3:1-4 / 필립 1:3-11 / 루가 3;1-6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가끔 교회 행사가 있어서 서울 주교좌성당에 갈 때, 베이지색 타일로 된 길쭉한 건물이 덕수궁 돌담길을 마주하고 성벽처럼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건물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건물 소유주가 성공회 교단이라서 성공회빌딩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세실극장이 있다고 해서 세실빌딩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렇지만
이 건물의 원래 명칭은 ‘성공회 회관’입니다. 김수근(金壽根)과 함께
한국 현대건축 설계의 양대 거장인 김중업(金重業)의 설계로
만들어진 이 건물은 서울시 미래유산 건축물로 지정된 정동의 대표적인 현대건축물 중 하나입니다. 그러면 성공회 회관은 언제 그리고 어떠한 계기로 설립되었을까요? 이것을 이해하려면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1965년 5월 27일, 75년간의 ‘외국인 선교사 시대’를
마감하고, 첫 한국인 주교가 탄생합니다. 그렇지만 당시 대한성공회는
더 이상 외국의 원조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교회를 운영하고 선교해야만 하는 과제를 떠 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립의 일환으로 성공회빌딩 건립 계획이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논의를 거쳐 1973년 11월 26일 정식승인을 받고,
1975년 7월 9일 기공식을 한 뒤, 1976년 3월 1일
준공해 축복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 때 이 건물 입구 정초석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문구를 새겼습니다. 이날 준공식 행사에서
이 공사를 책임 맡았던 분께서 그 문구를 새긴 의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본 회관의 초석에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우리의 명확한 목적이 명기되어 있습니다. 부디
이 회관은 이 교회와 사회에 유익하게 공헌 되도록 관리 운영되기를 기원합니다. … 그 재원의 용도가 교회의 생명을 죽게 하는 존재가 되는 것을 엄중히 경각하여
기도와 인내로써 오류를 범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는 동시에 이 회관은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로서만 공헌되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정동이야기』에서
발췌) 이러한 이유로 성공회 회관은 재정수입을 위한 임대나 교회행정을
위한 업무공간으로만 사용하지 않고, 문화와 예술 그리고 사람들의 모임공간 등 한국현대사에 ‘말없는 증인’으로서도 그 소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성공회 회관의 정초석에 새겨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문구는 사실, 그리스도교 영성과 예술에서 자주 인용되는 상징입니다. ‘AMDG’라는
암호 같은 이 말은 라틴어 ‘Ad Majorem Dei Gloriam(For the greater glory
of God)’의 약어이고, 그 뜻은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입니다. 이 말은 원래 예수회(Society of Jesus)의 모토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비단
특정 수도회의 정신을 넘어서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추구해야 할 좌우명이기에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정신은 오늘 우리가 들은 제2독서 필립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사도 바울이 신자들에게 소망했던
내용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올바른 일을 많이 하여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필립 1:11)” 이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할 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하느님 믿는 것은 복도 받고, 구원도 받는 등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는 건데,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한다면 우리의 영광은 어디에 있으며, 이건 신앙을 미끼로 우리를 착취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류의 비판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종교는 인간을 소외시킨다’ 등의 기독교 비판과 궤를 같이 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동조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의문과 비판은 기독교 정신의 정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말들입니다. 왜냐하면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하느님은 세상의 우상들처럼 인간 위에 군림해서 우리를 부려먹는 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세상과 인간의 참된 행복을 위해 임마누엘 하느님으로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와 똑 같이 되셔서,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셨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은 우리가 소외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일치된 우리도 영광스럽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하느님을 세상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선교’라고
합니다. 대림 2주일에 들은 독서와 복음은 이것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제1독서 말라기(Book
of Malachi)에선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을 ‘특사’라고
표현하고 있고, 루가 복음에선 이것을 ‘예언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사(特使)란 말 그대로 특별한 임무를 띄고 외국으로 파견하는 외교사절입니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권으로 배치된 말라기는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무렵에 기록한 책이라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들은 것처럼 하느님은 우리에게 특사를 보내실 것인데, 그의 임무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처음 맺었던 순수한 정신이 다시 살아나는 진정한 예배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한편, 루가 복음에서 인용한 이사야 예언자의 사명도 이와 비슷합니다. 다만, 말라키(Malachi) 예언자는 경고의 톤으로 말했다면, 제2이사야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에서 막 귀향하여 폐허가 된 조국을
보고 힘이 빠진 백성들에게 위로와 용기가 주는 방식으로 하느님 메시지를 전한 점이 구별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언자라는 말을 들으면 일반적으로는 앞일을 미리 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예언자는 우리 삶을 주관하시고 세상만물의 주재자이신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신의
대변인(代辯人)’이란 성격이 강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특사와 예언자는 일맥상통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자들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긴밀해야 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울을 그 관계를 긴밀히 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하라고 권고하십니다: “내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원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참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추어 점점 풍성해져서 가장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릴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순결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맞이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필립 3:9-10)” 이 대목에서 우리는 사랑과 정의를 연결시키는 중요한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참된 지식과 분별력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에 대한 참된 지식과
분별력이 부족할 때,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선과 악을 제대로 식별하지 못하는 무분별한 사랑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랑보다 하느님의 의로움만 강조하다
보면 무자비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식과 분별력이 있을 때 우리는 분별 있는 사랑, 균형 잡힌 정의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신앙과
실천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이라는 목표를 향해 갈 수 있게 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대림 2주일 교회는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의미에서 대림(待臨)은 그저 수동적으로 기다린다는 뜻으로만 이해하면 안 됩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오시는 분을 희망하며, 지금 여기서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노력도 동반해야 합니다. 구약에서
말라키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사제들과 백성들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의 길을 닦고 그 길을 고르게 하라고 외쳤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에서 “회개하고, 세례 받고, 죄를
용서받아라”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설교 서두에서 언급한
성공회회관 건축 이야기를 통해 우리 교단이 하는 모든 일이 교회가 목적이 아니라, 교회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 그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음 주 견진성사를 통해 한 걸음 더 성숙한
신자들이 탄생했음을 경축합니다. 특별히 전통적으로 교회는 견진성사 때,
고린토 전서에서 언급한 말씀에 기초해서 성령께서 주시는 7가지 선물-지혜, 통찰, 의견, 용기, 지식, 공경, 경외-을 간구합니다. 이러한
선물은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한 참된 지식과 분별을 위한 내적 능력들입니다. 모쪼록 다음 주 견진성사를 받을 분들과 우리 교회 모든 교우들에게도 다시 한번 성령의 은총이 임하기를 기원하며
그리하여 오시는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길 바랍니다.
인간의 몸으로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