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대림3주일 스바 3:14-20 / 필립 4:4-7 / 루가 3;7-18 희망을 기다리며 일반적으로 종교는 인간이 지향하는 초월적이고 영적 가치를 제시하는 신앙체계와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일반적으로 종교는 물질적인 측면을 좀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는 감각적인 종교이자 물질적인 측면을 영적측면 못지않게 중시하는 종교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영적 존재이자 물질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고, 손과 발을 비롯한 피부로 사물을 감촉합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성화를 보고, 성가를 듣고, 유향냄새를 맡고, 성물을 만지면서 거룩함을 체험합니다. 심지어 우리는 때때로 관상기도 중에 우리의 오감체험을 활용하여, 예수님의 체취를 느끼면서 주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맺기도 합니다. 이처럼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라는 감각은 우리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물질영역뿐만 아니라 영적영역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제가 입고 있는 분홍색 제의라는 시각상징을 통하여 우리 신앙에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대림3주일과 사순4주일을 ‘장미주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제는 분홍색 영대와 제의를 착용합니다. 보통 대림절과 사순절에 보라색 영대와 제의를 입음으로써 속죄와 회개의 시간임을 상기시켜 주고 있지만, 오늘처럼 대림과 사순 중간에 분홍색 제의를 입음으로써 기쁨의 시간이 곧 도래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상징뿐만 아니라, 성경과 전례문을 읽고, 성가를 부르는 청각상징을 통해서도 동일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 필립비서에 나오는 4장4절의 말씀,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Gaudate in Domino semper)”에 근거하여 대림3주일을 '기뻐하라 주일(Gaudate Sunday)'로 부르고, 사순4주일은 이사야서 66장 10절 말씀, “예루살렘아, 즐거워하라”에 근거하여 '즐거워하라 주일(Laetare Sunday)'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처럼 장미주일은 대림절이건 사순절이건 모두 기쁨을 기다리는 주일입니다. 다만, 사순시기 장미주일이 부활하실 예수님을 고대하는 기쁨이라면, 대림시기 장미주일은 태어나실 아기예수님을 고대하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오늘 대림시기 장미주일에 우리는 3번째 분홍색 대림초를 키고, 분홍색 영대와 제의를 입고, 성가대는 기뻐하라(gaudate)를 찬양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제1독서는 바빌론 유배생활에서 고향땅 이스라엘로 돌아온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멸망으로 치욕을 당한 이스라엘 민족은 해방을 맞아 다시 자신들의 나라와 성전을 재건하는 꿈에 부풉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며 일제치하에서 막 해방되었던 당시 사진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서울역, 종로, 서대문형무소 등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해방’이란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고, 형무소에선 무고하게 옥살이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수척한 몸이지만 환희에 찬 표정으로 나오는 사진을 보면서 한 민족이 해방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느껴봅니다. 어쩌면 해방의 날 교회 역시 기쁨의 종소리를 울리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제1독서 스바니아서가 외부로부터 오는 기쁨을 묘사했다면, 제2독서 필립비서는 우리 내부에서 솟아나오는 기쁨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유럽전도에서 최초로 세운 교회인 필립비 교회공동체 신자들에게 쓴 편지인 필립비서에서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라고 말씀하고 계시지만, 사실 그 편지를 쓸 당시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풀려 나갈 수도 있는 대단히 불확실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사도 바울은 ‘기쁨’을 희망하고, 노래하고, 교우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엄청난 정신력이자, 깊고 깊은 신앙심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두 개의 독서를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희망을 기다리는 존재라는 점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이 희망을 간직했기에 이스라엘 민족은 나라가 멸망하고 유배당하면서도 살아남았고, 사도 바울을 비롯해 초대교회 공동체는 거대한 로마제국의 위세에도 주눅 들지 않고 부활하신 나자렛 출신 예수를 온 세상에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희망을 갖고 인내심 있게 기다리기 위해서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요? 이 질문은 오늘뿐만 아니라 예전부터 쭉 있어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여라(루가 3:8)”라고 하자, 세리며, 군인이며, 일반백성들이 “어떻게 해야 하느냐?(루가 3:10)”고 묻습니다. 그러자 세례자 요한은 세리들에게는 정한 대로만 받으라고 하고, 군인들한테는 협박으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은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하십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며 논어에 나오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논어> ‘안연(顔淵)편’에 보면, 기원전 6세기 경 제(齊)나라의 왕 경공(景公)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선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회개라는 단어가 기도와 영성훈련에선 심오한 차원을 갖고 있지만,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회개는 우리 삶에서 내가 내 본분에 충실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공자님이나 세례자 요한께선 우리 모두 자기 본분에 충실할 때, 사회는 의로워진다고 하십니다. 더욱이 정치인이 사익을 탐하고, 기업인이 과도한 이익을 위해 불법을 저지르고, 법조인들이 탐욕으로 법집행이 공정하지 못하는 추문을 들을 때마다 공자님과 세례자 요한의 이 말씀이 생각나면서 우리사회가 자신의 본분을 지키는 모습으로 회개하길 바랍니다. 이처럼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전해준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이 단순하면서도 명료해서인지,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혹시 모두가 기다리던 구세주(그리스도)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세례자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머지않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 그분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루가 3:16)” 세례자 요한의 이 말씀은 자신의 사명이 어떤 건지 명확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즉 자신은 구세주가 아니며, 오실 구세주를 예비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각자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회개하는 삶이라고 설파하신 세례자 요한은 그 가르침을 자신에게도 엄격히 적용합니다. 바로 이와 같이 언행일치(言行一致)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 때문인지 예수님께서도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 11:11)”라고 극찬하셨습니다. 참으로 세례자 요한은 강직하면서도 동시에 겸손한 위대한 예언자입니다. 우리 신앙인들, 특히 저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성직자들은 더더욱 겸손의 모범으로 본받아야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현재 우리는 코로나 이후의 시대, 즉 뉴 노멀(New Normal)이라는 새로운 것이 정상이 되어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까지 당연한 행동과 생각들이 당연하지 않게되고 그것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때론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 어느 나라와 민족도 피해갈 수 없는 세계적인 대혼란이자, 거대한 변화입니다. 최근 프랑스, 시리아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엄청난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격동도 그러한 변화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교회의 선교와 사목방식에 대한 전면적 반성과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하는 국면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마치 작금의 모습은 2000년 전 사도들이 이제 막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어린 그리스도교를 거대한 이방세계에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했던 때로 다시 돌아간 느낌입니다. 이와 같은 거대한 변화의 시기에 전 세계 각처에서 다양한 교회공동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기도하고, 희망하며, 새로운 선교적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유투브, 페이스북 등과 같은 SNS를 활용하여 이른바 ‘온라인 선교’, ‘온라인 교회’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고, 어떤 교회는 개인 대 개인 간 혹은 소그룹 모임을 통한 인격적이고 사적인 소통을 통해 신앙의 깊이를 추구하려고 하고, 또 어떤 교회는 문화와 예술영역, 직장과 일터를 활용한 비슷한 관심사와 직업군끼리 삶과 신앙을 나누는 모습의 교회공동체가 등장하는 등. 실로 다양한 선교적 실험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다양한 선교와 사목을 잘 할 수 있는 새로운 성직자 양성체계를 고민하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중에 우리 각자와 우리교회 공동체는 무엇을 희망하고, 무엇을 고대하고 있나요? 오늘 성서말씀처럼 우리는 스바니아 예언자처럼 환희를 희망할 수도 있고, 사도바울처럼 고난가운데서도 기쁨을 기도하고 노래할 수 있고,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면서 오실 구세주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다 함께 예배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 각자와 우리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우리교회에 주시려는 기쁨을 고대하고, 희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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