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2 다해 대림4주일
미가 5:1-4상 / 히브 10:5-10 / 루가 1;39-45
변화는 변방에서부터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는 심오한 동양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한
가운데 동그라미는 만물의 근원인 태극이고, 이 안에 음과 양이라는 두 가지 원초적 성향이 있는데 이로부터
사물이 갈라져 나와서 괘(卦)라고 하는 만물이 표출됩니다. 고대 동양철학의 고전인 『주역』을 보면, “역에 태극이 있으니, 양의를 낳고, 양의는 사상을 낳고,
사상은 팔괘를 낳는다(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역(易)은 ‘바뀐다’, ‘변화한다’라는 뜻이며 영어로 change로 번역합니다. 그리고 태극(太極)이란
세상만물의 근본원리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궁극원리인 태극으로부터 좀 더 구체적인 원리인 음과 양이 도출되는데, 이것을 양의(兩儀)라고
부릅니다. 그런 다음, 이러한 관념적인 원리가 현실세계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 첫 번 째가 사상(四象)입니다. 예컨대, 춘하추동 4계절이 사상의 한 형태일 수 있고, 우리 몸의 체질을 분류하는 사상체질도
이러한 원리에 입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으로부터 사물은 이제
8, 16, 32, 64괘로 상징되는 다양한 만물로 분화되어 생성됩니다. 이것이 우리 동양인들이
생각하는 세계이해방식입니다. 특별히, 동양의학과 우리의 전통
절기에는 이러한 원리가 적용되어 있습니다. 동양인은 이처럼 세상을 고정불변한 것으로 보지 않고,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동양인들도 태극이나 도(道)와
같이 불변하는 진리를 인정하지만, 그 불변함이 우리 현실세계로 들어올 때는 변화하는 것으로 자신을 계시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변화의 시작은 다른 한쪽이 극할 때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하지와 동지입니다. 하지(夏至)란 낮이 가장 긴 시간이고, 동지(冬至)란 밤이 가장 긴 시간입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 하지는 양기가 최고조로 달한 때이고,
동지는 음기가 최고조로 달한 때입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으로 볼 때, 음기는 하지에서부터 시작되고, 양기는 동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을 보면서 동시에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가능성을 감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원리는 우리 그리스도교에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독서와 복음은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제1독서 미가서 5장1절부터 4절은 그리스도교 전통에선 예수님 탄생을 예고한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 것 없으나 나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난다(마가 5:1)”는 구절을 들을 때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자연스럽게 연상합니다. 그런데 모든 예언말씀은 항상 그 예언이 일어났던
당시 시대 상황이란 맥락도 함께 봐야 그 의미가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미가 예언서도 예언자가 그런 말씀을 하신 배경이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미가 예언자는 기원전 8세기에 활동한 농촌
출신 예언자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 유다는 주변에 아시리아라는 강대국과 전쟁으로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웃나라와 갈등보다 더 심각한 것은 도시에 있는 힘 있는 자들이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아 부를 거머쥐고, 농민들을 소작농으로 전락시키는 부패와 억압이라는 사회구조였습니다. 그러기에
미가 예언자는 하느님이 주시는 약속과 희망은 예루살렘과 같은 권력과 부가 몰려 있는 곳이 아니라 베들레헴과 같은 작은 읍내에서 메시아가 태어나
그 변화의 희망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언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변혁은
보잘것없다고 여기는 변두리로부터 일어날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변화란 어떤 것인가요?
신약시대 초대교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그 변화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서 시작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율법은 장차 나타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고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해마다 계속해서 같은
희생제물을 드려도 그것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할 수는 없기(히브 10:1)”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제2독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단 한 번 몸을 바치셨고 그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히브 10:10)”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기존의 유대교 및 주변의 종교들과 구별되는 점입니다. 즉, 기성종교들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동물, 심지어 타인의 생명까지도
희생하는 것을 반복해서 요구하는 데 반해,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받아들이고 그
도리를 실천할 때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율법의 종교는 나 살기 위해 너를 죽여야 하는 거고,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통해 나도 살고, 너도 사는 것을 지향하는 종교입니다.
이와 같이 앞서 언급한 상생(相生)과 변화(變化)의 모범이
오늘 복음과 마리아의 노래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두 여인,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하느님 말씀에 순종한 훌륭한 신앙의 본보기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은 평범한 노(老) 사제 즈가리야의 아내였습니다. 그들은 슬하에 자식 하나 없는 부부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관념으론, 부부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상태였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아무런 복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즈가리야와 엘리사벳이 사제 가족이었기에 그 창피함이 더 했을 것입니다.
거기에다 몸도 늙어서 더 이상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가 아이를 가졌으니 참으로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엘리사벳이 오랫동안 아이 없는 설움으로 속앓이를 했다면, 마리아는
다른 측면에서 속앓이를 했던 것 같습니다. 아직 정식결혼도 하기 전에 아이를 가졌으니 말입니다. 비록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하나,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이 상태를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마음이 너그럽고 순박한 약혼자 요셉 마저도 오랫동안 번뇌하면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을(마태 1:19)”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다행히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신앙심
깊은 요셉이 그 메시지를 받아들였기 망정이지, 실로 돌 맞아 죽을 수도 있었던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처럼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마치 동짓날 밤처럼 가냘픈 희망을 잉태하고 긴긴 밤을 지내야 했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심정을 그 누가 온전히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비록 나이 상으로 큰 차이가 났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섭리에 동참하면서 여러 어려움을 감당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믿음의 동지이자 서로를 제대로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친구였던 것입니다.
만일, 이들이 중심부에 있던 사람들이었다면 과연 하느님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실행할 수 있었을까요? 즈가리야와 엘리사벳이 남들처럼 젊었을 때, 아이를 낳고 키웠다면 그들이 과연 자식이 없어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으며, 생명의 소중함과 간절함과 절실함을 얼마나 공감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마리아가 남부러울 것 없이 부유하고, 어릴 때부터 자신이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권세 있는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면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하느님의 충격적인 제안을 과연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못했을
겁니다. 그러기에 변방에 살던 마리아는 자신의 처지와 기개를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껏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루가 1:48, 51-53)”
하느님은 이제 ‘변방의 여인들’을 통해 당신의 위대한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를 통해 이제 그들은 그 일을 감당할 내적 힘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의
살과 피로 변화됩니다. 성탄의 예언이 이제 곧 실현됩니다. 그리고
며칠 후면 우리는 이 신비를 기념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성서가 보는 세상은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보다 더 넓고 깊습니다. 아직
오지 않았지만 그러나 도래할 세상까지 봅니다. 마치, 예수님
오시기 800년 전, 미가 예언자가 이스라엘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구세주가 오실 것을 본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늙은 산모가 새 생명을 갖게 되고, 산골 처녀가 온 세상을 구할 구세주를 잉태했듯이 말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때때로 우리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차원을 잉태하고, 희망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밤이 가장 깊을 때 낮은 그 밝음을 조용히 시작합니다. 그리고
변화는 중심보다 변방에서부터 불기 시작합니다. 어제 밤 우리는 일년 중 밤이 가장 깊은 동지를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제부터 낮이 점점 늘어날 거라는 것을 압니다.
기후위기와 전쟁 그리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격변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아기 예수 오심을 기다리며 구원은 어쩌면 화려하고 거창하게 오기 보다는
조용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오고 있음을 다시 한번 기억합시다. 그러므로 이 어려움에 좌절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다가올 성탄을 기쁘게 맞이합시다.
베들레헴 작은 마을에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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