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20250126 은총의 해를 받아들이기 위하여(다해 연중3주일)
작성일 : 2025-01-26       클릭 : 22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0250126 다해 연중3주일

느헤 8:1-3, 5-6, 8-10 / 1고린 12:12-31 / 루가 4:14-21

 

은총의 해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리스도교는 유대교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신약성경뿐만 아니라 구약성경도 읽는데, 사실 구약성경은 유대교의 경전입니다. 다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구원사역이라는 관점에서 구약성경을 읽는 점이 그들과 다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드리는 예배, 특별히 말씀의 전례는 유대교 예배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안식일에 예수께서 고향에 있는 회당에서 성경을 읽고 설교를 하신 유대교 예배장면 중 일부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시대 예배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요? 그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그들은 신명기 6장의 말씀,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로 예배를 엽니다. 그리고 18개 신조로 된 기도문을 바치고, 모세 오경과 예언서를 낭독합니다. 그런 다음 설교를 합니다. 설교는 회당장이 정하는데, 만일 성경을 해석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손님으로 참석했을 경우, 그에게 설교를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갈릴래아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던 예수께서 고향 나사렛에 왔을 때, 안식일 예배에서 예수님이 예언서 낭독과 설교를 하신 것은 이런 이유인 것입니다.

예배 때 예수님이 읽으신 말씀은 이사야서 61 1절부터 2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루가 복음 저자는 이사야서의 이 말씀 중에 억눌린 자들대신에 가난한 이들, 그리고 우리 하느님께서 원수 갚으실 날이 이르렀다고대신에 억눌린 자들에게 자유를 주며라고 원래 구절을 약간 바꿔서 편집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기쁜 소식은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했던 그 시대 상황, 즉 이스라엘 민족이 이민족으로부터 지배를 받던 식민지 상황과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루가 복음 저자의 선교적 관심은 단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차원이 아닌 모든 사람들, 특별히 당시 로마제국 하에서 소외되고 어려움에 처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초대교회 시기, 특별히 루가 복음 저자가 속한 교회 공동체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루가 복음은 이사야서의 이 말씀을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이라는 차원보다는 보다 보편적인 해방과 구원이란 지평으로 재해석했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은총의 해(루가 4:19)’에 대한 이해도 달라집니다. 우리가 흔히 희년(禧年)’이라고 칭하는 주님의 은총의 해는 원래 이스라엘에서 7년 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을 7번 지난 50년째 되었을 때 지내는 해(레위 25:10-11 참조)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희년을 요벨의 해라고 부르는데, 이는 숫양의 뿔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희년이 되면 전국 각지의 언덕 꼭대기에서 요벨, 즉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불어 희년을 선포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희년이 되면 땅을 경작하지 않고 쉬게 하고, 빚을 탕감해 주며, 빚을 갚지 못해 노예가 된 이들을 해방시켜 주고, 매매한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이스라엘이 이집트 노예에서 해방된 사실을 잊지 말고, 세월이 흐르면서 형성된 불평등하고 억압된 사회구조를 정화해서 자유롭고 평등한 형제자매관계를 유지하라는 하느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루가 복음 저자는 이러한 희년정신을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테두리를 넘어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온 인류로까지 확장시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읽으신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증언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읽으시고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루가 4:21)”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을 직역하면 이 성경은 오늘 여러분의 귀 안에서 이루어졌다입니다. 이는 이사야가 예언한 구원이 예수님의 오심으로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 희년 또는 구원은 언젠가 이루어질 미래의 사건이 아닌 지금 이루어지고 있고, 이루어져 가는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설교에 대해서 오늘 복음에는 없지만, 4 22절 이하에는 청중들이 예수님의 이러한 설교에 대하여 칭찬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하고 수군거렸다고 합니다. 왜 그들은 칭찬하면서도 수군거렸을까요? 저는 그 원인을 그들이 안목(眼目)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들이 예수님의 집안도 잘 알고, 어렸을 때부터 예수님을 봐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잘껏 없는 목수 집안 출신 예수가 어떻게 저렇게 설교를 잘해. 그럴 리가 없어!”라고 현실을 부정하고 평가절하했던 것이 아닐까요? 결국, 그들의 그런 태도가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희년, 즉 주님의 은총이 가져오는 엄청난 선물인 구원의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고향에선 기적이 일어날 수 없다는 주님께서 말씀을 달리 표현하자면, 하느님이 은총과 구원이라는 기적을 주고 싶어도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고향사람들의 딱한 모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루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그것은 단지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에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탄생한 초대교회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사건임을 예견한 것입니다. 즉 루가 저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초대교회에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했기에, 그 말씀은 이제 고국을 벗어나 이방인의 땅으로 갈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오랜 전통에 관존민비(官尊民卑)사상이 깊이 각인되어 있다 보니 일단 높은 관직이 오르면 유능한 사람이려니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경영학자는 이것을 서열화, 계급화, 차별화, 경쟁화의 함정, 서계차경(序階差競)의 함정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서계차경의 함정이 무서운 이유로 첫째로는 진실, 공감, 용기와 같은 덕목이 기초가 되는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된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사회적으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초래되어 결국 오늘날과 같은 승자독식과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잔인한 사회로 변질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병든 사회와 대척점이 되어야 할 대조사회로서의 교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나요?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의 능력으로 형성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몸의 지체가 각기 수행하는 역할이 달라도 모두 하나로 연결되었듯이, 교회의 직책과 은사가 달라도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1고린 12:13)”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한 지체가 아프면 함께 아파하고, 한 지체가 영광스럽게 되면 다른 지체도 함께 기뻐한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사람들을 줄 세워서 차별하고 소외시키고 서로 간의 경쟁으로 다투게 하는 사회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평등한 형제자매들로서 각기 받은 은사와 능력을 존중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선포한 주님 은총의 해, 즉 희년이 선포되는 장소, 구원이 일어나고 있는 곳인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이 기쁜 소식을 당신 고향에서 선포하셨고, 주님의 뜻을 이어받은 교회 역시 이 소식을 예루살렘에서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포는 예수님 고향과 예수님 고국을 넘어서 온 세계로 퍼져 나갑니다. 교회는 그것을 복음화, 즉 선교라고 부릅니다. 동시에 교회는 그 복음을 증언할 뿐만 아니라 살아 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을 서열화하고 계급화하고 차별화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고, 성령의 능력으로 하느님이 창조하신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려는 희년의 정신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타락하지 않고 늘 신선한 모습,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것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고향 땅 나사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셨을 때, 회당에 있던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감탄하면서도 그 말씀 안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능력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교회가 지탄을 받은 것도 예배에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그 구성원들이 그 말씀 속에 있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들이고 실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느헤미아서는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멸망한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기간이 끝난 후,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다시 듣고 응답하며, 무릎 꿇고 예배하는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느헤미아서가 증언한 모습처럼 한국 교회도 잃어버린 복음의 정신을 다시 되찾고, 무너진 성전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희년이 오길 기도합시다. 그럴 때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슬퍼하지 마라. 야훼 앞에서 기뻐하면, 너희를 지켜 주시리라(느헤 8:10)”라고 하신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주님 은총의 해를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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