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29 설날 민수 6:22-27 / 야고4:13-17 / 마태 6:19-21, 25-34 을시년스러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동아시아의 전통명절인 설날입니다. 양력으로 이미 2025년이 되었지만, 음력으로 첫날인 오늘에서야 비로소 갑진(甲辰)년이 가고, 을사(乙巳)년이 시작되었습니다. 태양을기준으로 하는 양력이 도입되기 전, 우리 선조들은 음력으로 시간을 계산했습니다. 그리고 이 계산법은 하늘을 뜻하는 10개의 천간(天干)과 땅을 뜻하는 12개의지지(地支)를 조합하는데,올해는 푸른색 목(木)기운을 상징하는 천간인을(乙)과 뱀을 뜻하는 지지인 사(巳)가 결합된 이른바 ‘푸른뱀’해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이처럼 하늘과 땅, 음과 양의 조화를 통해 시간을 계산하고, 우리 몸을 진단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해석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서구의 기술과사상을 흡수하여 빠른 성장을 이루었지만, 한편으론 우리 조상들이 물려주신 삶의 지혜를 계승하는데 좀소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런 의미로 우리는 서양과 동양의 지혜를 통합적으로 수용하여 정신적으로나물질적으로나 성숙하고 풍요로운 삶이 되길 희망합니다. 흔히들 마음이나 날씨가 어수선할 때 우리는 ‘을시년스럽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을사년과 관련이 있습니다. 원래 이 표현은 ‘을사년스럽다’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마음과 날씨가 어수선한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요? 그것은 1905년에 벌어졌던 불행한 우리 역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역사시간에배워서 아시겠지만, 1905년은 일본이 군대를 동원하여 정동(貞洞)에 있는 중명전(重明殿)을 포위하고 대한제국 관료들을 협박해서 강제로 조약을 체결한해입니다. 이 을사늑약(乙巳勒約)은 고종의 인준도 받지 않은 불법적인 조약입니다. 그 결과, 대한제국은 외교권이 박탈된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고, 고종은 이조약의 불법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지만, 외교권이없다는 이유로 회의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일본은 이 일에 책임을 물어 고종을 퇴위시킵니다. 이처럼 일제의 강압과 이에 편승한 이완용 같은 을사오적(乙巳五賊)들에 의해 우리나라는 망국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을사년은우리 근대사에 트라우마와 같은 상처를 남긴 해입니다. 120년이란 세월이 흘러 을사년을 다시 맞은 대한민국이현재 겪고 있는 혼란한 상황 그리고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을시년스러운’ 기운이 우리나라에 다시 퍼지지 않도록 우리 모두 마음을 모아 기도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근심걱정으로 괴로워하는 우리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먼저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무엇을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무엇을 걸칠까, 목숨을 어떻게 늘일까도걱정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시선을 나와 내가 이룩한 것들에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으로돌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보이는 자연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섭리를 깨우치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설 명절 때마다 이 복음과 이와 관련된 설교말씀을듣지만, 살기위해 바둥거리며 살아가는 우리에겐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는 초연(超然)한 말씀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여러분은 성경말씀과 성직자의 설교를 들으면서 아마도 ‘공자님 말씀(!)’처럼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설교를 하는 저 역시 이세상을 살아가는 존재 중 하나이기에 예수님 말씀을 마냥 초연하게만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예수께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갖고 씨름하는 가운데 제가 오래 전에 들었던 지인의 경험담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 바둑을 참 좋아했습니다. 심지어 수도원에입회해서 수련과정 시절, 매일 점심식사 후에 한 시간가량 수련장 신부님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공동체여가시간을 의무적으로 할 때도 저는 자주 바둑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제 바둑 스타일은 일종의싸움바둑이었습니다. 그것은 상대가 바둑돌을 놓으면 지체 없이 반격을 하고, 어떤 때는 상대가 바둑돌을 놓자마자 곧바로 손을 씁니다. 그러다마음을 통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대에 코가 꿰어 끌려 다니곤 했습니다. 당시 수련장 신부님도 저랑 비슷한바둑스타일이시고, 실력도 비슷해서 저와 수련장 신부님은 자주 바둑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기면 신부님이 시무룩해지고, 신부님이 이기면 제가시무룩해지기도 했습니다. 비록 오락거리였지만, 저는 바둑을통해서 제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즉, 바둑을 오래두어도 실력이 향상되지 않는 점을 발견하고, 어떻게 하면 좋은 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수련원에서 바둑고수인 형제로부터 몇 가지 조언을들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이 세운 몇 가지 원칙을 알려주었습니다: 첫째, 급하게 돌을 놓지 않고 반드시 상대의 의도와 다음 수를 알아본다. 둘째, 돌을 놓기 전에 먼저 전체 국면을 생각한다. 셋째, 돌을 놓기 전에 다음 수가 부분과 전체 국면에 초래하는 영향을생각한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바둑의 목적을 생각하는 것인데, 만일심신을 유쾌하게 하는 목적이 아니라 마음이 심란하거나 머리가 복잡할 때는 바둑두는 것을 좀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의 말을 듣고 참 많은 것을 깨달었습니다. 그래서저는 그의 이야기를 바둑뿐만 아니라 삶의 태도로까지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오늘복음에서 우리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해 보자면, 이 말씀은 우리가 결코 속세를 벗어나 무릉도원같은 목가적 생활을 즐기라는 것이 아니라, 바쁜 세상사 속에서도 좋은 심성을 유지하고 바쁨 속에서도흐트러지지 않도록 하는 법을 어떻게 체득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은 마음이 피로하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렇지만, 몸이 바쁘다고 마음이 꼭 피로한 것은 아닙니다. 근심이 너무 많거나혹은 불필요한 미련들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할 때 마음이 피로한 법입니다. 사실, 심리적 문제의 대부분을 자세히 생각해 보면, 모두 근심을 떨쳐 버리지못하기 때문에 비롯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근심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세속적 욕망과 스트레스에파묻혀 스스로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비롯된 것은 아닐까요? 옛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본심(本心)을 잃은 것이라고 불렀고, 우리가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하느님이 주신 자신의 본심을 다시 찾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우리의 시선을 자연으로 돌리라고 하신 것은 어쩌면 당장 눈 앞에 있는 것들에 급급해서 놓치고 있던 내 본래의 모습을 찾기 위한 방법을 알려 주신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에선 이것을 ‘모든 것안에서 하느님을 찾기(Finding God in all things)’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우리가 마음을 열고 잘 본다면, 우리는이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분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그 만남은 우리를 진정한 나, 즉 하느님이 태초에 만드신 ‘하느님 형상(Image of God)으로서의 나’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서양말에서 구원이라고하는 salvation은 라틴어 salus에서 나왔는데, 원래 그 말은 개인과 나라의 건강과 번영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말이 교회용어로 들어오면서 구원이라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건강하게 되는 것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2025년을사년 새해 아침, 우리는 다 함께 모여 조상의 영혼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삶을 위해 예배를 드립니다. 이 예배를 통해 조상들께는 하느님 안에서 건강함을, 우리에게는 이세상 안에서 건전한 삶을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각박한 이 세상을 살면서 잃어버린 본심을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때론 가끔 여유를 두고 나를 관조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도는 이것을 위한 효과적인 영적도구입니다. 또한 어떠한 이해관계가아닌 순수한 마음으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친교를 나누면서 우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정체성을 확인하는 공동체 시간도 필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한 해를 을시년스럽게 보내지 않고 따스하게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날들을 주신 주님의 선물에 감사드리며, 시간의주관자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