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20250216 행복선언과 불행선언(다해 연중6주일)
작성일 : 2025-02-16       클릭 : 44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0250216 다해 연중6주일

예레 17:5-10 / 1고린 15:12-20 / 루가 6:17-26

 

행복선언과 불행선언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예레미아서 179절은 사람의 마음은 천길 물속이라, 아무도 알 수 없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동서양 모두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예레미아서는 이어지는 1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야훼만은 그 마음을 꿰뚫어 보고 뱃속까지 환히 들여다본다. 그래서 누구나 그 행실을 따라 그 소행대로 갚아 주리라.”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비록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감춰서 상대를 속일 순 있지만, 하느님은 속일 수 없으며 하느님은 그 행실을 보고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 ‘인간의 마음은 보이지 않아서 잘 파악이 안 되지만, 그 마음은 언젠가 반드시 행동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의 과거를 보면 미래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타고난 성향은 잘 바뀌지 않기 때문에, 일정 정도 일관성과 지속성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그 사람이 과거 큰 사건 속에서 보여준 행동 양태에서 어떤 역량을 발휘했는지 알게 된다면, 그가 장래에도 그런 행동으로 어떠한 성취가 가능할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어떤 분들은 반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령, 어렸을 때는 내성적이었던 사람이 성인이 돼서는 활발하게 활동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사람의 성향은 변할 수 있다고 반론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가능성의 씨앗을 갖고 있어서 환경조건이 바뀌면, 자신도 몰랐던 타고난 역량을 발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잠재된 씨앗이 뭔지 알아가고 키워가는 노력을 일생동안 해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하느님이 주신 나만의 정체성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본래 모습을 못 찾고 남들과 비교하다가 불행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신앙생활이란 하느님을 알아가는 여정이자, 동시에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참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나는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그 유명한 진복팔단(眞福八端) 선언입니다. 이것은 루가복음과 마태오복음에만 나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진복팔단하면 루가복음보다는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말씀으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태오 복음은 진복팔단이란 제목에 걸맞게 복 받을 8가지 유형의 사람을 언급하고 있는 반면에, 루가복음은 4가지 행복선언과 4가지 불행선언이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진복팔단이라기보다는 행복과 불행선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합니다. 그리고 마태오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산에서 말씀하셨다고 해서 산상수훈이라고 하고, 루가는 이 말씀을 평지에서 말씀하셨다고 해서 평상수훈이라고 합니다. 비록 산상수훈, 진복팔단이란 이름으로 마태오 복음의 말씀이 더 알려져 있지만, 오늘 들을 루가복음의 평상수훈 역시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서로 상반되는 것을 대조하는 방법은 루가복음에 나타난 중요한 특징인데, 대표적인 예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후,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노래한 성모 마리아 송가(Magnificat)’입니다. 루가복음 146절부터 53절에 있는 성모 마리아 송가는 오늘 들은 행복과 불행선언처럼 현재의 불행이 행복으로, 그리고 이른바 현재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장차 불행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루가복음에 나타난 행복과 불행선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행복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4가지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4가지 선언 중 앞에 있는 3가지는 예수님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그것은 가난하고, 굶주리고, 그래서 울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연민과 위로의 말씀이자, 더 나아가 그러한 현세의 불행을 너무도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하느님나라에서 풍족하게 해 주고 웃게 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선언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4번째는 당시 초대교회의 상황을 고려하여 루가복음저자가 첨가한 행복선언입니다. 루가복음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다가 주변으로부터 박해받고 있던 당시 신자들을 보면서 예수께서 가난하고 굶주리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주셨던 것처럼 반드시 그들에게도 하늘에서 받을 상을 마련해 주신다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루가는 행복선언과 짝을 맞춘 네 가지 불행선언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부유한 사람들,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 웃고 지내는 사람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부자가 불행한 이유에 관해서 4세기 밀라노의 주교이자 대표적인 교부학자인 성 암브로스(St. Ambrose)의 주석에 의하면, 불행선언에서 언급한 부자들이란 자신들이 소유한 재물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이들 유형은 앞에서 언급한 사람들과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과 배부른 사람들, 우는 사람들과 웃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처지가 역전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리아 송가와 비슷한 형식입니다. 또한 이것은 루가복음이 일관되게 전하고 있는 메시지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루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신자들에게도 구약의 거짓 예언자들처럼 왕과 백성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하지 말고, 복음의 진리를 전하다가 미움, 배척, 모욕, 중상을 당하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 거짓예언자들이 곡학아세(曲學阿世)로서 칭찬받았을지 몰라도, 그들은 하느님 눈 밖에 나서 결국 불행한 처지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궁극적인 보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셨고 우리는 그 부활을 믿고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2독서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째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가련한 사람일 것입니다.(1고린 15: 19)”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인간의 행동과 마음의 양태는 마치 빙산과 같습니다. 그런데 해수면 위에 드러난 빙산의 진짜 모습을 파악하려면, 우리는 해수면 아래에 있는 거대한 실체를 봐야 합니다. 인간도 이와 같습니다. 보이는 모습이 전부인 듯 하지만 진짜 모습을 알려면 행동 이면에 보이는 실체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마음은 무척 깊고 복잡한 체계로 작동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의식하는 행동 밑에 있는 거대한 무의식의 영역은 참으로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심리학, 철학 그리고 종교적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학문의 도움과 자신의 노력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내가 누군지 깨달아야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태초에 하느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성품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6절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고 태어났습니다.

설교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신앙생활은 내가 참된 나를 알아가는 여정입니다. 동시에 참된 나를 알게 된다는 것은 참된 하느님을 알게 된다는 것과 같습니다. 달리 말해 우리의 영성은 하느님의 영성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참된 행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행복과 불행선언은 우리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이자 행복의 참된 목표가 아님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마치 수면에 드러난 빙산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말과 행동에 현혹되어 거기에 휩쓸리지 말고, 보이진 않지만 보이는 것들 밑에 있는 보이지 않는 더 큰 차원에 주목하고 깊이 침잠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거기서 하느님이 주신 온전한 하느님의 형상(Image of God)’을 만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 형상은 라는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적 차원으로까지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태초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닮은 자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나 역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와 같이 너와 내가 우리로 하나 되는 신비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행복과 불행이라는 이분법을 초월하게 됩니다. 이 세상은 네가 가난해야만 내가 부자가 될 수 있어’, ‘네가 굶주려야만 내가 배부를 수 있어’, ‘네가 울어야 내가 웃을 수 있어라는 차별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너와 내가 부자가 되고, 너와 내가 배부르게 되고, 너와 내가 웃는 일치의 법칙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하느님 나라의 법칙을 미리 맛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곳이고, 그 나라를 향해 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오늘 행복선언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루가 6:23)”라고 위로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참 행복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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