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20250406 죽음과 부활의 갈림길에서(다해 사순5주일)
작성일 : 2025-04-06       클릭 : 19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0250406 다해 사순5주일

이사 43:16-21 / 필립 3:4-14 / 요한 12:1-8

 

죽음과 부활의 갈림길에서

 

사순절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교회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좀 더 다가감과 동시에 그 너머에 있는 부활이라는 새 생명을 암시합니다. 오늘 전례에서 들은 성경말씀은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잘 느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들은 제1독서는 이 점이 두드러지게 보여집니다. 사실 이사야 예언자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 메시지를 전했을 때, 그들은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왕국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이 파괴당했고, 일부 가난한 사람만 남겨진 채 지배층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간 비참한 상태였습니다. 그동안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제사를 드리고, 그것을 국가와 민족의 구심으로 삼은 그들의 신앙적, 정치적 정체성은 바빌론 유배로 인해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죽음의 상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절망적 상황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 예언을 선포합니다. 예언자는 유다 민족의 원초적 경험인 출애굽 사건을 언급하며 구원자 하느님을 상기시킵니다. 그는 과거에 커다란 기적을 행하신 야훼 하느님께서 포로로 잡혀 있는 그들에게 다시 구원의 손길을 펼치실 거라는 희망을 노래합니다. 그렇지만 그러기 위해선 백성들은 두 가지 태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지나간 일에 더 이상 마음을 두지 말라는 것과 또 하나는 하느님이 하신 새로운 일을 볼 수 있도록 눈을 떠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하느님이 선택하신 당신의 백성은 다시 기쁨을 되찾고, 주님을 찬양하고 기릴 거라는 겁니다.

이와 같이 슬픔이 기쁨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게 되는 그 상태를 오늘 노래한 시편 126 5~6절에서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뿌리는 자, 기뻐하며 거두어들이리라.

씨를 담아 울며 나가는 자, 곡식단을 안고서 노랫소리 흥겹게 들어오리라.” 

이처럼 이사야 예언자의 메시지에 언급되었듯이,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기 위해선 우리는 생각과 마음 그리고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선 이것을 회심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회심이란 참으로 어렵고도 힘든 일입니다. 그것은 단지 나의 나쁜 행동과 습관을 고치는 차원뿐만 아니라, 더 근원적으로는 내가 갖고 있는 관점과 생각의 변화까지도 요구받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선 전자보다 후자가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러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오늘 들은 복음은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 향유를 부어드린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네 복음서 모두 나옵니다. 그런데 루가 복음은 이 여인이 죄를 용서받음에 감사한다는 것으로 묘사한 반면에, 요한복음을 포함한 세 복음은 예수님의 장례와 연결시킵니다. 그리고 네 복음서 가운데 오늘 들은 요한복음만이 이 여인의 이름이 마리아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언니는 마르타이고, 오빠는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린 라자로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아라는 마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오빠 라자로를 살려 주신 예수님에 대한 보답으로 이들 남매는 예수님과 그 일행 그리고 마을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한 것 같습니다. 남매들 중 맏이인 마르타가 식탁시중으로 바쁘게 움직일 때, 동생 마리아는 순 나르드 향유 한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립니다. 그러자 그 향기가 온 집안에 퍼집니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그 집안에 오빠 라자로의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마치 죽음의 냄새가 물러가고 생명의 향기가 들어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일반적인 풍습으로 볼 때, 왕이나 직분이 있는 자를 임명하거나 집주인이 손님을 환대할 때 향유를 머리에 붓는데 반해 마리아는 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을까요? 사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는 유대인의 일반적인 풍습에 따라 예수님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요한복음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씻어드린 행위를 13장에서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겨 드리는 것과 연결시킵니다. 그것은 바로 헌신적인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잡히시기 직전에 제자들을 극진히 사랑해 주신(요한 13:1)’것처럼 마리아도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녀는 아마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면 잡혀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느꼈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정성을 쏟았던 같습니다.   

마리아의 이러한 행동에 대한 주변사람들을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예수님과 늘 동고동락했던 제자들마저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하기까지 합니다. 제자들 중 한 사람인 가리옷 사람 유다는 다음과 같이 비난합니다: “이 향유를 팔았더라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았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요한 12:5) 여기서 예수님 당시 노동자 하루 일당이 한 데나리온인 점을 가만해보면, 그것은 300일 품삯에 해당하고, 이것을 오늘날 노동자 하루 일당이 10만원이라고 가정해서 환산해서 보면, 3,000만원에 해당되는 제법 큰 금액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정도 액수를 발 닦아드린 일회성 일에 소비했다면, 아마 여기 있는 우리들도 제자들처럼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기이한 일로 여겼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직접 설명하십니다: 이것은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마라.”(요한 12:7)

가리옷 사람 유다의 비난에 대하여, 요한복음 저자가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도둑이라서 그런 말을 했다고 부연하고 있지만, 그 설명은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배반을 겪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 반영된 구절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아마도 유다의 속마음을 아직 몰랐던 제자들 역시 유다의 말에 동조했을 것이고, 마리아의 그런 이상한 행동과 그런 마리아가 자신의 장례를 위해 한다는 예수님의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온갖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자신들이 대망하고 있는 메시아, 다시 말해 이방인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다윗왕과 같은 강력한 나라를 세우실 임금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현된다면 그동안 고생하며 따랐던 자기들도 한 자리씩 차지할 거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런 의도가 없이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존경하고 흠모했던 마리아만이 예수님을 향하여 점점 조여오는 악의 기운을 감지하였고, 어찌 해 주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실로 마리아만이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순 없지만, 직감적으로 예수님이 죽음의 갈림길 앞에 서 계셨던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교회는 사순절 동안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라고 권고합니다. 동시에 그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을 향하고 있음을 알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이 올 때, 심지어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것은 부활로 넘어가기 위한 과정에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막상 고난이 오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 부활을 믿고 의연하게 대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처럼 연약한 우리에게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노력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그것을 이미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필립 3:12-14)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뒤, 온전히 회심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가 쌓아 올린 업적, 자신이 투철히 믿었던 신념, 그리고 그러한 신념을 반하는 자들을 준엄하게 심판하고 몰아낸 열정의 방향을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바꾼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길과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간 사람입니다. 그런 바울을 예수님은 당신의 은총으로 그를 나날이 성숙하고 풍성하게 해 주셨고, 복음의 기초로 삼으셨으며, 온 세상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스승으로 세우셨습니다.

이제 다음주 성지주일부터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집중해서 기념할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주일을 통과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핵심을 기념하는 이 시기!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인가요? 제자들이 꿈꿨던 그런 슈퍼맨 예수님인가요? 아니면 사도 바울이 만났던 그런 그리스도인가요?

우리는 비록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잘 알기에 이런 질문에 대해 쉽게 정답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의 삶에서 죽음과 부활의 갈림길에 설 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쉽게 결정을 못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닌다면, 그것이 정확히 뭔 지는 몰라도 우리는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있을 것이고,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죽음과 부활의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이 되어 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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