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20 다해 부활대축일
사도10:34-43 / 1고린15:1-11
/ 요한20:1-18
십자가와 부활
지난 주간 우리는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성주간이라고 부르는 일주일을 시작하는 성지주일에 우리는 성지가지를 들고 예루살렘에 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모습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성난 목소리로 돌변하는 군중들의 모습까지
재현했습니다. 그리고 성 목요일에는 세족례를 통해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성 금요일 십자가 예식을 통하여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고, 부활전야에는
빛의 예식을 통해 죽음이라는 어둠을 뚫고 빛으로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기념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절인
오늘 우리는 다시 모여 우리 신앙의 정수인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의 핵심들이 단 며칠만에 빠르게 전개된 탓에 우리는 성주간의 가치를 충분히 숙고하지 못한 채, 일정표에 쫓기듯이 치룬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부활의 의미를 성주간뿐만 아니라 40일 前 재의 수요일로 시작된 사순절의 의미와 함께 성찰하고자
합니다.
40일 전, 우리는 이마에 재를 바르며 “인생아 기억하라,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라는 말을 들으면서 사순절을 시작했습니다. 이 예식은 유한한 인생을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다시 자각하게 해주면서, 우리로
하여금 삶에 대한 겸손된 태도를 갖도록 도와줍니다. 동시에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신 분이 …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셔서 …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신”(필립 2:6-8) 예수님의 ‘자기비움(케노시스κένωσις)’에 대한 깊은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광야에서 악마로부터 유혹받으시는 예수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기서 악마는 예수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 더러 빵이 되라고 하여 보시오”(루가4:3)라고 유혹합니다. 그 때 예수께서는 “사람이
빵만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루가4:4)라고 대답하십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성 목요일 최후의 만찬을 통해 돌을 빵으로 만드는 대신 세상에 빵을 공급하는 성찬의 공동체를 세우셨습니다. 기적을 행하고 힘을 과시하는 대신 영적인 힘을 지닌 공동체를 세우신 것입니다. 교회는 이 날을 성체제정일로 정하고, 이러한 예수님의 정신을 기억합니다. 친교와 나눔을 뜻하는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란 말은 바로 이러한 예수정신을 잘 표현해 주는 말입니다.
악마는 다시 예수님을 당시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서 뛰어내려 보시오” (루가4:9)라고 유혹합니다. 이 말은 단지 악마의 말일수도 있지만, 어쩌면 우리들의 말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메시아를 원하지만 고난 받는 메시아를 원하진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생을 쉽고 편하게 살고 싶지 고난을 겪으면서 살고 싶지 않기에, 우리가 믿고 따르는 신(神)이 우리처럼 무기력하지 않고 강해야만 우리도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은 우리가 현실 삶에서 매 순간 직면하는 고통이나 감정과는 무관한 신이며, 저 멀리 있으면서 인격적이지 않은 ‘추상적인 신’에 불과할 것입니다. 성 금요일 우리는 온 세상 사람들이 주목받는 높은 곳에서 화려하게 떨어져 보라는 악마의 유혹을 거절하고 가장 비열하고 비인간적인 형벌인 십자가에 못박혀 높이 올려진 예수님을 봤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광야에서 했던 악마의 유혹에 대한 예수님의 답입니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높이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8:28)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까? 사실,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마주할 때,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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