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04 다해 부활3주일
사도 9:1-20 / 묵시
5:11-14 / 요한 21:1-19
단절된 확신과 좌절 그리고 부활
부활절 다음날인 4월
21일 월요일, 예수회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거했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물론이고 교파를 초월해서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26일 장례미사가 거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각지에서 온 추기경들은 5월 6일부터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conclave)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라틴어로 ‘함께’라는 뜻의 ‘cum’과
열쇠를 뜻하는 ‘clavis’에서 유래된 이 말은 ‘열쇠로
잠근 방’을 뜻합니다. 그 이유는 교황 서거 후, 추기경들이 외부와 단절된 채 새 교황을 뽑을 때까지 선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콘클라베 선거방식은 13세기에 가서야
정착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교황선출이 성공회 주교를 선출하는 방식과 비슷했습니다. 즉 성직자와 평신도가 다 함께 모여 선출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로마제국 멸망 후, 로마주교의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선거에서 평신도가 배제되고, 급기야 주교들 중에서도 엄선해서 추기경이라는 직위를 만들고, 그들에게만
교황이 될 자격을 부여했습니다.
지난 월요일 저는 극장에서 <콘클라베>라는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로버트 해리스(Robert Harris)의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한 이 영화는 고풍스러운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을 배경으로 붉은 색 캐석을 입은 추기경단과
그들 안에서 벌어지는 신념과 야망, 전통과 변화가 절제되면서도 격렬하게 충돌하는 현장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비록 이 영화에는 현실과 부합하지 않은 요소도 있지만, 대체로
오늘날 교회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잘 다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 중에서
저는 ‘단절’, ‘확신’,
‘좌절’ 그리고 그 단단하고 밀폐된 공간과 정신을 뚫고 들어오는 ‘신의 개입’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오늘 우리가 들은 성서말씀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제1독서를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 서로 상반되는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구(舊)신앙에 충성스러운 인물인 사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신(新)신앙을
대표하는 인물인 아나니아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 간에는 크나큰 간극이 있고, 그래서 서로를 의심하고 심지어 없애 버려야 할 존재로 여깁니다. 비록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과 신앙에 충실하였지만, 단절된 가치체계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콘클라베>에서도 서로 단절된 두 개의 대표적 가치관
간에 충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 축은 이탈리아 추기경 고프레도 테데스코(Goffredo Tedesco)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추기경 조슈아 아데예미(Joshua
Adeyemi)로 대표되는 보수파가 있고, 다른 한 축은 이탈리아계 미국인 추기경
알도 벨리니(Aldo Bellini)로 대표되는
진보파가 있습니다. 이들은 각자 전통수호와 교회개혁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면서 서로에 대하여 전쟁을
벌입니다. 이처럼 회심 이전 사울로 불리던 유대 정통파 바울과 그리스도교라는 신생종교를 믿는 아나니아
사이, 또한 콘클라베에서 보수파와 진보파 추기경들 간에는 서로 단절된 채, 자기확신에 꽉 찬 견고한 신념의 성(城)들이 있습니다. 이들 간에 상호이해와 대화라는 관용과 다양성의 정신은
과연 공존하기 불가능한 걸까요?
다음으로 오늘 복음을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는 한 때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요한 13:37)라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 “우리도 함께 가서 그와 생사를 같이합시다”(요한 11:16)라고 선동했던 도마를 비롯한 여러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정작 스승이 잡히자, 그들은 스승을 모른다고
잡아떼고 줄행랑 쳤습니다. 결국 스승과 함께 꿈꾸어 온 하느님 왕국 운동은 좌절되었고, 낙향(落鄕)해서 예전모습으로
되돌아갔던 것입니다. <콘클라베>에서도 홍색 캐석을
입고 있는 거룩하게 선발된 최정예 엘리트 집단인 추기경들 속에 숨겨진 나약함과 죄성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아프리카 주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교회전통의 수호자로 자처하던 나이지리아 추기경은 젊었을 때 불륜으로 낳은
사생아가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었고, 교황청 고위직에 재직하고 있는 프랑스계 캐나다인 추기경 조세프 트랑블레(Joseph Tremblay)는 많은 정보와 재력을 바탕으로 동료들을 매수하고,
경쟁자들의 약점을 흘려서 낙마시킵니다. 그러나 그는 교황이 죽기 직전에 그의 행동을 질책하고
파면시킨 것을 감추다가, 콘클라베를 주관하는 수석 추기경 토마스 로렌스(Thomas Lawrence)의 의심과 조사에 의해서 그 비리가 폭로되어 낙마합니다. 또한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된 의외의 인물인 아프카니스탄의 비밀추기경(‘in
pector’ cardinal) 역시 외모는 남성이지만, 몸 안에 여성 생식기관이 있는
간성(間性 intersex)이라는 성(性)정체성을 지녔습니다. 이처럼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이나 영화<콘클라베>에
등장하는 추기경들의 면면을 볼 때, 이들이 과연 우리 교회의 초석을 논 사람들인가, 이들이 과연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 영적 지도자감인가 하는 회의와 좌절감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단절된 그들의 세계로 들어오는 하느님의 개입을 살펴보겠습니다. 콘클라베 셋째 날, 선거를 주관하는 수석 추기경 로렌스가 투표용지를
들고 기도문을 읊고, 고개를 들어 천장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벽화를 바라보고 나서 투표함에 용지를 넣는 순간, 천장의
일부분이 폭발하고 무너지면서 그 파편이 추기경들을 덮칩니다. 폭발의 충격으로 약간의 찰과상을 입은 추기경들은
이 폭발사고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른 폭탄테러였으며, 이 사건으로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다는
보고를 듣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교회가 대처할 방향을 가지고 격렬한 논쟁과
진지한 대화와 경청을 갖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스티나 성당에서 투표를 합니다. 그 때, 카메라는 폭발로 깨진 유리창 너머로 바람이 불어와 투표용지가
가볍게 떨리는 장면을 비춥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하겠다고 결심한 교황 요한23세(1958년~1963년 재위)가
“창문을 열어야 합니다. 나쁜 공기도 들어오겠지만 그래야
신선한 공기가 들어옵니다”라고 했던 말씀이 연상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도 하느님의 개입이 등장합니다.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갖고 기독교 박해에 앞장선 사울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당신의 신성을 계시하시며, 눈이 멀 정도로 큰 충격을 주십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숨어서 기도하던 아나니아에게 바울을 통해 이루실 선교계획을 알려주시며, 박해자 사울을 형제로 맞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리하여 교회역사상
한 획을 긋는 큰 사건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들의 과오로 의기소침해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성스러운 식사를 하시고, 그들과
다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십니다. 그런 다음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요한 21:18)라고 하시며 목자의 사명을 주십니다. 이제 그들은 고립된
밀실에 갇혀서 자신들의 죄스러운 나약함을 감추고 상대를 향해서 정죄하는 완고한 신념에 찬 이데올로기스트(ideologists)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갓 잡은 물고기를
먹고 생명을 나누며, 성령의 신선한 바람으로 탁한 정신을 없애고 맑은 정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개입은 인간들 간의 단절로 인해 발생한 완고한 신념뿐만 아니라 우리의 나약함을 넘어서 더 넓은
지평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 교회 안팎으로 우리는 큰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천주교는
교황의 서거로 콘클라베를 통해 새로운 교회지도자를 뽑습니다. 성공회는 영적 구심점인 저스틴 웰비(Justin Welby) 캔터베리 대주교의 사임으로 새로운 후계자 선임절차를 진행중에 있습니다. 모두 소수의 엘리트 집단 내에서 검증되고 선발되는 과정을 거쳐 탄생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인간적인 고뇌와 편견, 그리고 확신이 얼마나 쉽게 오만과 독선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는지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현실의 진동을 통해 닫힌 문을 여십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더 이상 세상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견고한 성(城)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또한 그것은 비단 교회뿐만이
아닙니다. 한 국가의 정치시스템의 정점을 이루는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의 수반들과 거기에 속한 엘리트 집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그들이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할 때, 하느님의 개입은 영화<콘클라베>에서 로렌스 추기경이 자신의 이름을 적어 투표함에 넣으려는 찰나, 폭발의
진동이 성당을 뒤흔드는 외부의 충격이라는 방식으로 신의 개입이 일어나서 그들의 내면을 균열시킬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성스러운 세계와 세속의 세계 모두를 당신의 섭리로 변화시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하느님의 개입을 믿고 희망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부활신앙이 가져다주는 선물입니다.
이제 머지않아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시 국가의 지도자를 뽑는 과정에 돌입합니다. 이 기간 동안 눈에 보이는 인간의 방식과 눈에 보이진 않지만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개입이 조화를 이루어서 거룩하고
선하며, 지혜롭고 용기 있으면서도, 세상의 소리에 경청하고
소통할 수 있는 열린 리더십이 세워질 수 있도록 소망하며 기도합시다.
“권능과 부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 받으실”(묵시 5:12)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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